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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문스독

[다자츄] 눈이 멀어버린 날 中

* 컬러버스
* 上편( http://xkznshin.tistory.com/191 )의 과거 1 - 고등학생 시절


1.
"다자이 상, 넥타이가 삐뚤어졌는데요."
"날 놔둬, 아츠시 군."
"그래도 학생회잖아요."

쿠니키다 군이 날 멋대로 처박은 거라니까.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다자이는 순순히 넥타이를 당겨 올렸다. 느슨하게 목에 매달려 있던 넥타이가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 잘 하셨다며 아이를 대하듯 칭찬을 해 주니, 아츠시 군보다는 어른이라며 톡 쏘아붙인다.
나카지마는 듣지도 않은 것처럼 대충 알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임원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늘은 이 고등학교의 입학식, 질서 유지를 위해 소집된 학생회 임원들은 별다른 일이 없다면 각자 지정된 자리에 얌전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한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카지마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요사노 상, 도망갔어."
"란포 군도 같이 갔겠네."
"아악, 진짜!"

다시 잘 보니 두 자리가 공석이다. 아홉 명 중에 두 명이나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냐고 나카지마는 정말 속상한 듯 중얼거린다. 나카지마는 그들을 찾으러 갈 테니 제발 다자이 상만큼은 가만히 있어 달라고 했고,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총 뛰어가는 나카지마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다른 임원들에게, 다자이는 흘끗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나카지마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딱 강당 입구까지만.
그렇다, 다자이는 오늘도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아마 학생회는 나카지마가 없었으면 탈주의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회장인 쿠니키다가 그에게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달아주자, 괜한 책임감이 생겼는지 꼼꼼히 죄다 따지고 들기에 대부분은 얌전히 할 일에 매진하는 거다. 빠른 년생인 주제에 군기를 잡니 어쩌니, 철없는 녀석들에게 욕을 먹는 걸 보면 안쓰럽기만 하다.
왜 다자이가 그들을 거슬려 하면서도 한 마디 않느냐 함은, 그래놓고 어차피 나카지마가 무서워서 시키는 건 다 하기 때문. 사실 나카지마도 그 사실을 알지만 매일 도망만 가는 다자이보다 욕하면서도 일은 착실히 해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조용히 하고 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다자이는 '나처럼 그냥 말을 듣지 말던가, 멍청하기는.' 은근 자신의 자율성을 칭찬하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

다자이는 일단 강당에서 멀어진 채로 어디로 갈까 고민하며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우뚝 멈췄다.

"분홍색 벚꽃!"

그리고 다자이는 본인이 생각한 벚꽃 나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굳이 왜 '분홍색' 벚꽃이라 하였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자이는 색맹이다. 색이 안 보인다고 말하면 괜한 동정심 어린 눈빛이 돌아 아닌 척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흑백인 세상도 꽤나 볼만 한데 말아지. 어쨌든 색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면 괜한 의심도 받지 않으니까, 말한다 : 파란 하늘, 까만 머리카락. 물론 미스가 날 때도 있다.

"저기, 저기요."

그나저나 이쪽이 맞나? 걸음이 다시 멎는다. 색맹인 건 괜찮지만 길치인 건 불편한걸.

"저, 학생님? 아니, 이렇게가 아닌가."

다자이는 네 개로 갈라지는 길 가운데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은 허리를 콕콕 찔러오는 손가락에 깨어진다.

"죄송한데 입학식 어디에서 하나요?"

다자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강..., 당에서요...?"

빨간색을 봤다. 파란색을, 검은색을 봤다. 갑자기 세상이 색채로 뒤덮었다. 다자이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낯선 이는 다급하게 다자이의 옷자락을 쥐어온다.

"아프세요?"
"아, 아뇨. 제가... 지금 눈이 안 보이게 된 것 같아서요."
"네?"

눈이 멀어버린 날,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만난 날.


2.

그 날 이후 다자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간 색채에 익숙해지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녔다. 자신이 왜 갑자기 색을 볼 수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찾아봤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세상이 아름답게 뒤덮인다는 책, 다자이는 그것을 읽자마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도서관 책장에 꽂고 미련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운명은 무슨.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다자이는 뺀질나게 그를 쫓아다녔다.
나카하라 츄야, 1학년 B반. 크림빵을 입에 물리면 조용해진다. 이틀만에 알아낸 사실이다. 온 세상이 반짝였지만 나카하라는 특히 선명한 색을 띠고 있어 쳐다보기만 해도 시간이 마구 지나가는 터라 무언가 말을 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입에 빵을 물려주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선배, 나카하라는 그가 정말 불편했지만 차차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안녕, 아가."
"그 따위로 부르지 마요!"

아마 적응을.

"야, 너 방금 저 선배가 뭐한 거냐."
"뭐가?"
"뽀뽀..., 한 거 아니야?"
"그게 왜?"

응, 이상한 데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3.
"아가, 오늘따라 더 예쁘네."
"미쳐, 진짜. 똑같은 얼굴이잖아."
"나한테는 아가가 매일매일 새로운걸."
"나가줘."

농담도, 하고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귀찮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얌전히 있는 게 귀엽다. 처음, 그냥 너무 예뻐서 어색해 하는 애한테 입술을 맞대었을 때는 그렇게도 기겁하더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 한다. 반말을 써도 된다고 하자 머뭇거리더니 팍팍 이름을 내뱉는 것도 내가 편해져서 그런 거겠지. 반 년이 넘는 세월은 무시할 게 못 된다.
괜히 흐뭇해져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잠시 바라보다 눈을 비볐다. 색이 쨍, 너무 밝아서 조금 오래 쳐다보면 눈이 아파. 나카하라는 그런 모습에 걱정을 했다가도 다자이가 괜찮다고 하도 강조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고.

"근데 아가 뭐해?"
"니가 직접 보면 되잖아."
"나는 장님이라 못 봐."
"또 그 소리야, 멍청이가. 문자."

누구랑? 여자친구랑. 우리 아가 여자친구 생겼어? 화들짝 놀란 어조와 목소리에 나카하라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답했다. 불만이냐? 다자이가 열심히 고개를 젓는 게 시선을 주지 않아도 다 보여서, 나카하라는 별 말 없이 입술을 삐죽이기만 했다.

"아가."
"뭐."
"나 화장실 갈게. 이따 보자."
"오지 마."

기다려. 오지 말라고, 바보! 다자이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뒷문으로 달려갔다. 정말 급한가 보네, 하고 나카하라는 조금 웃었다. 다자이는 그 때 울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듯 다독이면서 다자이는, 얼굴을 적시다 못해 흘러 넘치기 시작한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었다. 얼굴이 따가웠다. 다자이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예비종이 쳤지만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당장, 나카하라를 처음 만난 그곳의 흙을 죄 끌어안고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 실제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다자이는 계속, 계속 되뇌었다. 괜찮아. 이럴 수도 있다는 거 알았잖아.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애의, 옆에만 있어도 된다.


4.
"다자이이...."
"응, 아가."

나카하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추욱하해. 어째선지 질질 늘어지는 발음에, 그럼에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다자이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다자이는 한껏 행복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나카하라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얼굴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자이는 의아해 하다가 손을 뻗었다. 눈치 채고 뒤로 물러나려던 나카하라는 조금 더 빨랐던 손에 붙들리고 만다. 다자이의 손이 나카하라의 뺨을 쥐었다.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것을 제외하고 모든 꽃다발을 바닥에 투둑 떨구었다. 졸업장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른다.

"울어? 아가, 울어?"
"바보야, 저걸 다 버리면. 버리면..., 어떡, 흐으으...."

결국 고개를 드는 나카하라와 눈을 마주치자, 눈시울이 순간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다자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놓는다. 일그러진 눈가가 아파서, 너무 아파서 다자이는 우왕좌왕 하다가 다리를 조금 굽혔다. 울고 있는 모습마저 너무 반짝여서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다자이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 눈물을 조금씩 닦아주었다. 혹시나 상처라도 날까 엄지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뭐가 그리도 서러운지 주먹을 꽉 쥐고 히끅거리는 나카하라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다자이는 달래는 것도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나카하라가 자신의 교복 두 번째 단추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것을 뜯어내려 애쓰면서 나카하라는, 울음을 꼭꼭 삼켜내며 말했다.

"나도 졸업하면, 그러면, 이름 불러줘야 해?"
"알았어."

지금은 아가. 울보 아가. 장난스레 건네온 말이 다자이와 나카하라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 떨어져서, 매일 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게 무서웠는데. 그랬는데 이제 괜찮아. 괜찮을 것 같아. 이렇게나 사랑 받고 있으니 괜찮아. 너의 옆을 누가 스쳐도 나는 괜찮아.
단추를 제 주머니에 밀어넣는 나카하라를 가만히 지켜보다 다자이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키스해도 돼? 졸업 선물. 조금은 떨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묻는다. 저도 우는 건지, 그런 물음에 긴장해선지. 나카하라는 잠시 이것이 선후배 사이에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가 생각하다 눈을 감았다. 곧 다자이의 입술이 평소처럼 닿았다. 축축한 혀가 축축한 입술을 문질렀다. 누구의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혀와 함께 얽혔다. 그래도 졸업이라는 거, 무지 슬프구나. 다자이는 나카하라를 가득 끌어안았다. 너의 기억에서 내가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