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님 연성교환♥♥
* 빌런데쿠캇
카츠키가 눈을 떴을 땐 아주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친구가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기 때문이었는지 친구는 예전과는 달리 한참은 커 보였다. 그 작고 왜소하던 녀석이 언제 저렇게 커졌지. 그는 치렁치렁 열쇠가 가득 달린 금속 팔찌를 찬 손을 흔들며 말했다. 캇쨩, 안녕.
카츠키는 그제야 정신을 퍼뜩 차렸다.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쓰러지기 직전 상황을 빠르게 생각해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정체모를 스프레이를 제 얼굴에 대고 망설임 없이 뿌리던, 복면을 쓴 남자. 아마 토끼 귀 같은 모양었을 테지만 가위로 잘랐는지 반토막이 난 귀를 단 복면을 쓴 남자. 아마 그 삐죽삐죽한 귀에 동경의 마음을 가득가득 담고 있었을 남자. 카츠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를 드러내며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데쿠, 이 자식…?!"
"그렇게 부르지 마."
오랜만에 만나놓고 이름도 안 불러주는 거야?
나긋나긋한 목소리에서는 저만 보면 안절부절 못하던 그 어린 소년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빙글 웃는 눈은 더 이상 익숙했던 빛이 아니다. 사람이라 칭하기에도 버거운 눈. 웃으면서도 웃지 않고 있는 그 눈은 그늘지고 공허해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되었다.
그 두 눈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순간이 알 수 없는 위압감을 가져다 주어서 카츠키는 딱딱 부딪히는 이를 악 다물었다. 그래봤자 데쿠다. 어쩌다 날 납치하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기고만장해 하지 말라고. 쓸모없는 무개성 돌멩이 자식이니까, 그니까. 카츠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니까 두려워하지 마. 아니면 적어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들키지 마.
그러나 이즈쿠에게 카츠키는 이미 그 심리를 들켰다. 입술을 길게 찢으며 웃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어 카츠키는 고개를 푹 숙이려다, 천장과 연결되어 목을 조이고 있는 족쇄 탓에 그 줄만 팽팽히 당기는 꼴이 되었다. 카츠키는 숨이 막히는 소리만 내며 고개를 다시 들었다.
결국 카츠키는 인정해야만 했다. 무개성 쓰레기인 건 여전할 테지만, 저건 예전의 눈치없고 바보같던 녀석이 아냐.
그것은 카츠키가 눈을 뜬 순간부터 확실했다. 예전의 데쿠 녀석이었다면 이딴 감금 플레이 같은 거 즐겨하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카츠키를 구속하고 있는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의 수갑과 족쇄는 데쿠의 취향이 아니었다. 이즈쿠의 취향이지.
카츠키는 몸을 조금만 비틀어도 찰랑이며 거슬리게 하는 이 금속 물건을 전부 폭발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개성이 나오질 않아서, 그래서 카츠키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는 그의 허리께를 딱딱한 나무 의자와 한 데 묶어 칭칭 둘러싸고 있는 밧줄도 한목했다.
이즈쿠는 겁 먹은 눈을 하고서는 아닌 척 잔뜩 경계 중인 제 친구에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캇쨩, 내가 무섭나보네. 카츠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카츠키는 그 감정 없는 표정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다정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카츠키는, 지금 제 주제를 잘 알면서도 이 두려움 만큼은 꼭꼭 감춰두고 싶어 발톱을 세우고 날카롭게 대꾸했다.
"이 몸이, 너 따위를? 웃기지마, 데쿠."
"난 데쿠가 아니라 이즈쿠야, 캇쨩."
그러나 그 발톱이 허울 분임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이즈쿠, 오랫동안 자신을 봐 왔던 이즈쿠라는 것을 카츠키는 잠시 잊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한참을 만나지 못해서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을 카츠키는 잠시 잊었던 모양이었다.
카츠키는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튕겨나가듯 일어서려 했으나 그의 몸을 꼭꼭 붙들고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로 인해 그 시도는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카츠키는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며?!"
내내 웃고 있던 이즈쿠의 입술이 축 처졌다.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이마에 힘줄을 돋우고 카츠키는 악을 썼다. 히어로가 되고 싶잖아, 악당이 아니라!! 이딴 빌런 따위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가, 너는, 데쿠는,
"데쿠가 아니야."
아까처럼 차분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냉기에 잠식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더 이상 데쿠라고 부르면 가만두지 않아.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심지어 눈조차 깜빡이고 있지 않는데 입술만이 작게 움직이며 카츠키에게 무어라 명령하고 있었다.
이즈쿠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카츠키 기억 속의 그보다 눈에 띄게 길어진 머리가 붕 떴다가 이마에 내려앉았다. 이즈쿠는 고개를 숙인 채로 카츠키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앞으로 돌진하려는 것처럼 몸을 이즈쿠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카츠키가 흠칫 놀라, 자신이 묶여 있는 의자 등받이에 바싹 붙었다.
"캇쨩은, 아직도 어린 애구나."
아직도.
카츠키의 한 걸음 앞에 멈춰 선 이즈쿠가 조금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카츠키는 위협하는 짐승 마냥 이를 드러내고 그르릉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즈쿠의 얼굴을 마주하려 했으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온통 가려 일 자로 다문 입술만 슬그머니 보일 뿐이었다.
잠시 몇 번 달싹이던 그 입술은 곧 천천히 열리더니, 갑자기 확 작아진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캇쨩은 왜 지금도 히어론지 뭔지 따위에 얽매여 살아? 캇쨩이 여기 나한테 잡혀 있어도 도와주러오는 히어로 하나도 없잖아. 그 사람들은 다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척 하는 거야. 정말 더러워. 역겨워. 왜 그러고 살지? 있지, 캇쨩도 사실 히어로 별 관심 없지? 그치? 그냥 캇쨩 개성 뽐내고 싶은 거잖아. 벌어먹고 살려고 다른 사람 도와야 되는 거 그러는 거 싫잖아.
그리고 이즈쿠는 고개를 확 들었다. 초점이 없는 동공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카츠키를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새까만 심해처럼 발을 담구었다간 쑥 빨려들 것 같은 눈을 카츠키는 저도 모르게 피해 버렸다. 카츠키는 이제 이즈쿠의 얼굴이 전부 드러났음에도 아까처럼 이즈쿠의 입술만 쳐다봤다. 그 입술은 제게 닿은 시선을 느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미소가 걸쳐진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말을 만들어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캇쨩.
"개성 그딴 거, 없애 버리자."
"…뭐, 인마?!"
"없어도 되잖아. 있으면 피곤하기만 해. 그치?"
이즈쿠는 웃음소리를 조금씩 쏟아냈다. 아주 작았던 그 웃음을 점점 커져 그들이 있는 작은 방을 가득가득 채웠다. 하나도 즐겁지 않아. 웃기지 않아. 카츠키는 얼굴에 확 드러난 공포감을 지우기 위해 티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개성을 어떻게 없애? 이즈쿠는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 건가 싶은 웃음이 지배하고 있던 얼굴은 순식간에 무미건조해졌다. 그리고 카츠키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려는 건지 대뜸 그의 이름을 불렀다.
"캇쨩."
"웃기지마."
그에 빠르게 뒤따라온 대답 아닌 대답에 이즈쿠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카츠키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씹듯이 뱉어냈다.
"개성을 어떻게 없애, 데쿠 주제에."
"데쿠 아니라니까, 캇쨩."
자꾸 그렇게 부르면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이즈쿠는 카츠키를 향해 남은 한 발을 내딛었다. 카츠키는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물러서려는 듯 발로 땅을 박찼지만 역시 불가능. 이즈쿠가 손을 뻗어 카츠키의 두 손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는데, 그 얼굴은 예전의 이즈쿠와 조금 닮은 듯 했으나 달랐다. 작작 쪼개라고 구박하기만 했어도 카츠키는 이즈쿠가 웃는 얼굴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지금 그의 앞에서 웃는 이 얼굴은 구역질이 나올 만큼 차가웠다.
"있지, 캇쨩."
그 목소리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천진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히어로가 빌런들을 물리칠 때마다 쓰던 말인데,"
"……."
"스매ㅡ쉬."
이즈쿠의 두 눈은 또렷하게 그리고 완벽히 카츠키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옆에 조금 떨어져 있던 동그란 탁자를 질질 끌고 왔고, 다른 한 손으로 묶여 있는 카츠키의 손을 당겨 그 테이블 위에 걸쳐 놓았다. 카츠키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뭐, 뭐, 뭔,"
"알지, 캇쨩도?"
그럼 마음 속으로 외쳐줘? 여전히 카츠키와 공중에서 시선을 섞으며 이번에는, 한 손으로 카츠키의 팔을 꾹 누르고 다른 쪽 손으로 조금 떨어진 공중에서 수갑이 흘러내려 드러난 카츠키의 손목을 정확히 겨냥했다. 이즈쿠가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카츠키에게,
디트로이트 스매쉬.
카츠키는 두려움 절망 무력감에 벌어진 입술을 다물 수 없었다. 카츠키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이즈쿠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빛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이럴, 리, 없, 어."
넌 무개성 쓰레기, 돌멩이…
"이럴 수도 있어."
지나치게 다정한 목소리.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무서워. 역겨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지금 카츠키의 세상이 끝나려고 한다. 그래서 카츠키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울지마, 캇쨩."
"아, 아…."
"날 미워하지 마."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나락에 빠진 두 눈을 향해 웃어주며 이즈쿠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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