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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겁페

[아라토도] 전지적 아라키타 시점

 


예뻤다. 그냥, 그냥 좋았다. 네 이름만 들어도 설레고 몽실몽실해지는 게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이것 참, 초등학생으로 되돌아간 것 마냥 유치해지는데 그게 또 싫지가 않은 거다. 네가 무얼 좋아하는지, 너는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너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 놓치기 싫었다. 어쩌다 보니 스토커처럼 된 것도 같지만 너는 그런 나를 알면서도 고갤 돌려 모른 척 해주었다. 너를 사랑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나는 잠시 착각을 했었다.
너는 그림을 그렸다. 어린 애들 소꿉장난 같은 그림 말고, 진짜 그림. 너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해 보여서,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예뻐 보였다. 너는 파스텔 톤의 색깔을 좋아했다. 꼭 너 같았다. 나도 그 색들을 좋아했다. 네가 좋아했으니까. 연한 파란색으로 한바닥 칠해진 캔버스를 보면, 너를 떠올릴 때처럼 마음이 몽실몽실했다.
너는 손이 무지 예뻤다. 여자처럼 가녀린 손은 아니었지만 펜을 꼭 쥔 네 손은 세상 누구의 것보다도 예뻤다.

널 향한 마음은 자꾸자꾸 불어났다.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결국엔 펑 터져 버렸다. 주체 못하게 밀려드는, 흘러 넘쳐버린 이 마음을 네게 건네고 싶었다. 너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직접 주고 싶었다. 너무나도 예쁜 너와 연애란 걸 하고 싶었다.
수줍은 사춘기 소년, 그런 건 없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미친듯이 달렸다. 무작정 불러내어 무책임하게도 네게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지쳐 헉헉대는 내게, 너는 갑자기 왜 이러느냐며 화를 내지도, 당황해하지도, 이렇다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넌 안 돼.
… 나?
응, 너. 넌 아냐. 다, 다 돼도 넌 안 돼.
난, 난 정말!
알아,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네 인생, 누구에게나 떳떳할 수 있도록 지금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많이 울었다. 어렵기만 한 네 말, 모른 척 흘려 보내고 울었다. 추하게, 네 앞에서 악 쓰며 울었던 것 같다. 떳떳하지 않아도 돼, 내 옆에 있어줘. 그거면, 그거 하나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넌 여전히 깨끗한 얼굴로, 하지만 조금은 아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떠났다.

시간이 지났다. 괜찮아졌다. 사실 알고 있었다. 너에게 외면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파 차마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했었다. 너를 원망하고, 미워 하겠노라 다짐하고, 다시 사랑하고. 이것의 반복, 반복, 반복이었다. 덮어 놓은 그것에 손을 뻗는 데는 몇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넌 너를 사랑하는, 그리고 그만큼 네가 사랑하는 내가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인생을 살길 바랐다. 그리고 너 자신 역시. 그래, 나를 아프게 한 것은 나를 위함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냥 너는 겁쟁이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모든 걸 받아 들이기에 내 마음은 너무 많이 아팠었고 너무 많이 어렸다.
네가 연애를 한다더라. 그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야아, 이 자식이 드디어 연애를! 호들갑스럽게 굴던 친구 녀석 옆에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너를 쳐다봤다. 언제나처럼 고요한 얼굴로,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게 눈으로 물었다. 나를 왜 불렀어? 너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너는 그저, 내게 반응을 바라고 있었다. 축하한다 한 마디를 바라고 있었다. 아, 생각났다. 난 그 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애초에 그 날은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았었던 것 같다. 아라키타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대. 나도 모르게 박차고 나간 자리에 남아 있던 녀석들이 허둥지둥 변명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아마 그게 맞을 거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절대 네 연애 소식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래도 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땐 조금 울었다. 정말, 정말 조금. 과거의 바보같은 순정에 짓눌려 잠시 눈물이 났던 것 뿐이다. 그 뿐이었다.

네가 죽었다. 급작스럽지만 그렇다. 사실이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넌 그림을 사랑했다ㅡ그것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ㅡ. 펜을 잡고 선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사랑했다. 네 두 손이 엉겨붙어 녹아 버린 그 날, 네게 주어진 오직 하나뿐인 선택.
너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끔찍이도 아꼈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다고, 결혼 후 답장 없는 내게 종종 보내던 문자 속에 섞여 있던 말이다. 글자 속에 들뜬 마음이 스며들어 있어 나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그 날, 온 집안을 뒤덮은 시뻘건 불꽃 속을 뚫고 나온 네 품 속엔 숨 넘어갈 듯 울어 제끼는 네 아들이 있었다. 몹시 지친 표정이었던 너는, 네 집으로 출동하고 있다는 소방관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 놀라 달려간 내게 아들 녀석을 안겼다. 오랜만이네.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두 손을 등 뒤에 숨긴 너는 작게 떨고 있었다. 제발 웃지 좀 마.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그냥 삼켰다.

하늘은 참 야속하지, 어떻게 그 고운 두 손을 앗아갔나.

괜찮아, 아이는 다치지 않았어. 밋밋한 노란 꽃다발을 들고 찾아간 병실에서 양 손에 붕대를 돌돌 감은 네가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꼬맹이 안부 따위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바보야, 네가 다쳤잖아.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꽃만 주고 나왔다. 고마워,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사실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는 네게 감정을 해방시킬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넌 그 날, 내가 고백했던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내내 웃었지만, 아니야, 넌 웃지 않았어. 넌 매 순간 울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 날 죽었다.

네 장례식은 조촐했다. 조문객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너는 그걸 바랐다. 결혼식처럼, 초대받은 이들만 왔다. 그 중 내가 포함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왜?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어서?
새까만 양복에 새하얀 꽃다발. 둘 다 너와 몹시도 어울리는 색이었다.
네 아들이 보였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상복을 입고 울음을 참는.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넌 언제나 도망만 치는구나. 네 뒤에 남게 될 사람은 그것이 누구라도 신경쓰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쳤지만 밝게 웃는 네 사진 앞에서 결국 나는 잡혀 버렸다.
날 부르지. 한 번이라도 도와달라 외쳤다면 어디에 있었든 달려갔을 텐데. 그까짓, 너 하나 구해내지 못한 그까짓 소방차보다 훨씬 빨리 도착해서 너를 꽉 안아줬을 텐데. 두 손이 아닌 내 전부가 녹아 내려도, 너니까 난 좋았을 거야.

… 그래, 네가 죽고 없어진 지금에서야 나는 내내 널 사랑했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