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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앙스타

[스바호쿠] 우산 하나

* 일반적인 학원물


비. 비가 온다.

호쿠토는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빗소리에 시선을 살짝 돌렸다. 전부 책상에 달라붙어 단잠을 취하는 와중 꼿꼿한 자세로 수업을 경청하는 모범적인 반장, 그만을 위해 열강을 펼치던 선생이 당황한 낯을 띤다. 자연히 작아진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호쿠토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비가 좋아!」


왜? 호쿠토는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언제나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원하구, 또, 홋케 닮았어. 그리고 비 맞은 나뭇잎이 반짝반짝ㅡ기다렸다는 듯 조잘조잘.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걸치고서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턱을 괸다. 아예 빗소리에만, 비가 창문에 부딪는 자국들에만 집중하겠다는 완연한 의사 표시. 창가에 그가 걸터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가벼운 한숨과, '역시 시끄럽네.' 싶은 생각. 사실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과거 회상과도 같은 것인데 말이다. 수업은 여기까지. 선생 역시, 다른 의미지만, 한숨을 내쉬며 포기 선언을 하지만 그마저도 듣지 못한다.

파아란 눈동자가 파아란 세상을 담는다. 파아란 눈동자에게 그 파아란 세상은 사실, 주홍빛.


***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자율 학습을 마치고 이제는 새카만 밖으로 발을 딛으려던 호쿠토가 멈칫. 우산을 놓고 왔다. 다시 교실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호쿠토의 표정이 귀찮음에 물든다. 잠시 멈추어 아무 생각 없이 내리는 빗방울을 쫓던 눈이 결국, 바라만 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에 체념한다. 그래서 건물 안쪽을 향해 뒤를 돌려는 순간


"……."


멀리서 무지갯빛 요란한 우산 하나가.

익숙한 우산, 하지만 흔하디 흔한 우산이라 호쿠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쪽으로 허리를 굽힌다. 우산에 가려져서 본인이 아는 사람이라면 확연히 눈에 띌 머리 색이 안 보여. 빠른 발걸음이 찰박찰박 물이 고인 질퍽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가온다. 이 정도의 거리라면 부름이 들릴 법도 해 호쿠토는 잠시 고민하다 목소리를 낸다.


"아케호시?"

"홋케!"


왜 망설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경쾌한 목소리가 바로 뒤따라온다. 호쿠토는 그만 웃어버렸다. 제가 이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데 아니면 우산을 가져왔을 수도 있는데,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우산을 들고 그리 가깝지 않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게 고맙기도 하고 그 답기도 해서 그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나 기다렸지?"

"네가 올지 어떻게 알고."

"믿었잖아, 올 거라고!"


확실하지 않은 게 아니냐며 타박을 주려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로 한다. 그러면 정말 기쁜 듯 웃으면서 허락 없이 안아오는 녀석을 꽤나 좋아하니까. 비에 젖은 우산이 다리에 닿지 않느냐고 투덜거리면 우산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다. 홋케에, 오늘도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넌 죽는다는 말을 너무 함부로 해. 그만큼 홋케가 보고 싶었단 거야.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호쿠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그의 팔을 당긴다.


"빨리 가자. 춥지 않아?"

"홋케랑 더 오래 있고 싶은데."

"주말에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주말은 주말."


투덜거리면서도 팔을 놓고 몸을 숙여 우산을 주워 든다. 별로 춥지 않았었는데, 온기가 떨어지자 괜히 추운 듯한. 호쿠토는 팔을 슥 쓸고 저를 향해 기울어지는 우산 아래에 몸을 밀어 넣는다. 바싹 붙은 어깨가 후끈후끈. 스바루 역시 마찬가지인지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몸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천장이 비를 막아주는 현관 앞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호쿠토가 손짓한다. 젖는다. 붙어. 스바루가 우물거리다가 '손 잡아도 돼?' 물어오자 고개를 끄덕인다. 금세 밝아진 얼굴이 몸을 겹치고는 손을 꼭 붙든다. 사이사이 파고드는 얇고 긴 손가락.

인문계에서 펜을 쥐기를 선택한 자신과는 달리, 본디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어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한 스바루의 손가락은 참 곱고 길고. 피아노를 칠 때면 진지해져 평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데, 바보 같은 그 표정도 참 좋아하지만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적응이 안 되어선지 괜히 설레어 오는 거다. 스바루는 호쿠토를 위해 연주하는 것을 좋아해 들어 달라 자주 떼를 쓰는데, 피아노 위에서 춤추듯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을 바라보다 호쿠토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떼기 일쑤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접촉보다도 손을 잡는 것이 가장 가슴 떨리지만, 들켰다간 '홋케 너무 귀여워!'라던가 '홋케는 역시 나를 너무 좋아해.'라던가 한층 텐션이 올라 신나할 게 뻔하니 아닌 척 한다. 스바루가 기분 좋아하는 건 호쿠토 역시 좋지만, 창피하다고 해야 하나.


"홋케, 어깨 젖어?"

"조금."


곧바로 제 쪽으로 기울어오는 우산에 슬쩍 보니, 스바루의 어깨에도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고 있다. 교실에 다녀올걸 그랬나. 손을 들어 스바루의 쪽으로 우산대를 민다. 스바루가 웃기지도 않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호쿠토의 손을 잡아 내린다. 홋케 감기 걸리면 안 돼. 너도 마찬가지거든.


"난 중요한 대회 얼마 전에 끝났고,"

"하아?"

"응?"

"중요한 대회.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호, 홋케 시험 기간이라 바쁘잖아. 신경 쓰게 하기 싫었어. 눈썹이 찡그려진다. 그를 잠깐 쳐다봤던 시선은 앞을 향한다. 혹시 화 났어? 그새 쩔쩔매며 비에 젖은 강아지 마냥 낑낑거리는 모습이 꽤 귀여웠지만 호쿠토는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한다. 매번 이런 식. 애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건 저만이 아니란 거야. 아무리 호쿠토를 위한 것이라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다음엔 꼬옥 말할게. 한 달 전부터 말할게. 화 내지 마. 응? 화 풀어어."

"안 말하면?"

"그럼 홋케 멍멍이 할게. 왈왈."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스바루에게까지 닿았다. 금세 환해진 얼굴이 호쿠토에게 바싹 들이밀어진다. 이제 화 풀린 거지? 그치? 이러는 걸 보면 지금도 충분히 강아지 같건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말해오는 게 웃기다. 이미 뒤에서 꼬리가 살랑이고 있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니까 얼굴 좀 치워봐."

"왜애? 막 설레?"

"저리 가라."


실실 웃으면서 몸을 뒤로 젖히는 스바루의, 저를 달래겠답시고 몸 그리고 우산까지 제 쪽으로 기울여대느라 다 젖어버린 어깨를 슬쩍 보고 호쿠토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우산, 두고 오기 잘 한 걸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