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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히로아카

[키리바쿠] 빗소리

 

「나는 비가 좋아.」

 

왜?

 

「뭐랄까, 전부 씻겨 내려가는 기분.」

 

뭐가?

 

「전부, 그냥 전부.」

 

그리고. 너는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 하나를 천천히 눌렀다. 느릿느릿 내려가던 건반이 탁, 소리를 내며 무언가와 부딪혔다. 그 어떤 소리도 묻힐 것 같잖아.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노래처럼 빗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나는 그 목소리에 홀려 멍하니 네 목 부근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건반이 만들어 냈을 소리는 내 귀까지 닿지 못했다. 빗소리에 먹혀 버렸다. 그런데, 왜.

 

네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을까.

 

***

 

별 시답잖은 기억이 떠올랐다. 피아노를 치던 너와 그것을 듣던 나. 정확히 말하자면 피아노를 친 건 아니고, 그냥 건반을 하나 틱 눌렀을 뿐이지만 어쨌든. 이 년, 정도 지난 일인가. 이 대화는 어째선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뜬끔없는 타이밍에 종종 떠올랐는데, 어떤 행동을 어떤 말을 했는지 심지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조차 선명하게 기억이 났지만 네 표정은 도통 떠올릴 수 없었다. 내가 네 뒤에 있었기 때문일까… 네가 뒤를 돌아봤던 것 같은데. 너는 종종 언짢을 때 미간을 좁히는 것을 빼면 대체로 웃는 얼굴이었으니 그 때도 웃고 있었을까. 그렇지만 그러기엔 네 목소리가,

 

"아."

 

콧등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생각을 멈추고 손등으로 코를 쓸었다. 우그러진 빗방울이 손등에 묻어났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 방울, 두 방울. 그 위에 내리기 시작한 비가 투둑 투둑 떨어졌고 손등을 타고 흐르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 근처였기 때문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에는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소나기인지 두세 방울의 경고 이후 세차게 쏟아지는 탓에 온몸이 쫄딱 젖어버렸다. 문을 쾅 닫고 현관에 서자 밀려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름인데도 젖으니 춥구나.
서둘러 신발을 벗고 까치발로 총총 걸어 거실에 교재들을 죄 펴 놓았다. 다 젖었어. 대충 펴 보니 볼펜 잉크는 번지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다행. 울상을 짓고 선풍기를 틀어 놓았다. 이러면 조금 빨리 마르지 않을까. 선풍기 바람이 닿자 시리기까지 한 팔을 슥슥 쓸며 화장실로 걸어가려다가, 한 발 딛은 순간 푹 젖은 양말에서 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감각에 화들짝 놀라 다시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씻고 나와 선풍기 앞에 멍하니 앉아 바람을 쐬며 겸사겸사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밀려오는 졸음에 하품이 쩍 나왔다. 역시 월요일은 무서워. 한 것이라고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 늦은 강의를 몇 개 들은 것 뿐인데 벌써 피곤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더니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졸았나. 눈을 꿈뻑이다 아무래도 자야겠다 싶어, 아직 조금 축축한 머리를 대충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척비척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나 혼자 살기에는 아주 넓은 집, 침대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중간에 쓰러져 잠들 것도 같았지만.

 

"더워…."

 

깨어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잠들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잠이 들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두 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집에 들어왔을 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으니 지금은 확인하지 않아도 새까만 어둠이 바깥에 내려앉아 있으리라.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어 깬 건지 더워서 깬 건지. 눈을 부비고 느리게 일어나 앉았다. 침대는 창가에 딱 붙어 있어서 손만 뻗어 커튼을 휙 걷어냈다. 단정한 아이보리색, 내 취향은 아니지만 도저히 뗄 수 없는 커튼. 손끝에 닿으면 괜히 저릿저릿한.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깬 순간부터 들려왔는데, 커튼을 여니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빗방울이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주르륵. 몸을 일으켜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냥,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침대 위, 창문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창밖을 쳐다보았다. 빗물이 모여 흐르는 아스팔트 위를 그냥 이유없이 바라만 봤다.

 

「나는 비가 좋아.」

 

눈을 세게 깜빡였다. 시선이 닿은 도로 위에 네가 서 있었다.

 

「뭐랄까, 전부 씻겨 내려가는 기분.」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의 너는 여름이라지만 비도 오고 해도 저물어 쌀쌀한 날씨에 헐렁한 반팔티, 츄리닝 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우리집 앞에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너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 너는 언제나 내게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3층에 있는 우리 집을 목 아프게 올려다보며 씨익 웃기만 하고 있었다.

 

「전부, 그냥 전부.」

 

나는 창문을 조금 더 열고 몸을 그 밖으로 기울였다. 세찬 빗줄기 사이로 너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역효과.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네가 더 흐릿해졌다.

 

「그리고.」

 

팔을 쭈욱 내밀었다. 너에게 손을 뻗었다. 잡힐 리 없지만 잡힐 것 같았다. 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예쁜 그 웃음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눈을 번쩍 떴다가 빗물이 들어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세게 감았다. 어서 눈을 떠서 너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찬 빗물 사이로 뜨뜻한 눈물이 흘러 눈이 아프지 않게 달래줄 때까지 눈을 뜰 수 없었다. 입술 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서, 어서 너를 보고 싶어. 그리고 눈을 뜰 수 있게 되어 황급히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땐 이미.

 

「그 어떤 소리도 묻힐 것 같잖아.」

 

너는 없었다.
또, 또.
또 너는 없었다.

 

네가 사라지자마자 가장 아프고 가장 서러운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정말 싫은 말. 자꾸만 머릿속을 울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정말 싫은 말. 어째선지 들으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말. 입술을 꾸욱 깨물자 빗물이 입 안으로 스몄다. 맛이 없었다. 아무런 맛도.

 

「비는 예뻐.」

 

네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징징 울렸다. 새로운 목소리였다. 어쩐지 귓가를 아프게 때리는 빗소리가 조금 작아진 것 같았다. 아니, 네 목소리가 컸을 뿐인가. 나는 너에게 뻗었던 손을, 네가 없어졌음에도 거두지 못했다. 네 목소리가 내 팔을 그렇게, 그렇게 붙잡아 두었다.

 

「난 예쁜 게 좋아.」

 

네가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아니 믿고 싶지 않아 괜히 허공을 두어 번 움켰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내 시야에 닿는 내 손은 빗물만 흥건했다.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나도 예쁘고 싶다. 너한테.」

 

빗속을 휘젓던 손이 멈췄다.

 

아, 생각났다.
그 때 네 표정이, 너를 본 지금에야 네 목소리가 어떻게 그걸 잊느냐며 나를 질책하고 있는 듯한 지금에서야 드디어 떠올랐다. 너는, 너는…

 

「나는 비가 좋아. 비가 오는 날은… 슬프지만.」

 

웃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그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이 아니라, 툭 치면 바스러질 만큼 희미하고 아프고 서글픈. 금방이라도 내 곁을 떠날 듯한 얼굴.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싫어했나 보다. 그 빗소리에 숨어 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너는 그러고도 남을 아이라서. 혼자 남게 될 나에게 미안한 척 하겠지만 결국 네 좋을 대로 할 나쁜 사람이라서, 너는.

 

「슬플만큼 아름다운 걸까?」

 

창밖에 내밀지 않은 손으로 커튼을 세게 움켰다. 하도 자주 빨아 끝이 닳고 색이 바랜 커튼을 한가득 쥐었다. 네가 남기고 간 흔적을, 사라져 버린 너 대신 움켜쥐었다. 손 안 가득 네가, 아니 네가 좋아하던 그것이 쥐어지자 괜히 눈물이 났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네가 그곳에 있길 바라. 나는 네가 사라진 집 안에서, 넓고 외롭고 슬프지만 바보같이 떠나지 못하는 집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바라고 있었다. 그걸 너무너무 잘 알아서, 오늘 밤 눈을 뜨고 창 밖을 다시 내다보지 못할 거면서.

 

너를 잃은 지 이 년, 네가 죽은 날마다 비가 온다.

네가 비겁하게도 빗속에 숨어들어 간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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