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미션
* 동거물
* 스팽킹
토도로키 쇼토는 얼간이다. 아니, 정정하겠다. 존나 엄청난 얼간이다. 섹스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옆구리나 쿡쿡 찔러대고. 녀석의 테크닉이라던가 지속력이라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나의 섹스 스타일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
토도로키 쇼토와 바쿠고 카츠키는 연인 사이다. 웅영 시절 매일 같이 폭주하던 난봉꾼 바쿠고를 어찌저찌 길들여 그의 연인이 된 토도로키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조련사 따위의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토도로키는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랑만 가득한 조련사. 일 년 가까이 동거 중인데도 바쿠고의 간절한 눈빛을 읽어낼 줄 모르니 사실상 자격 실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에 앞서 우선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 바쿠고에게는 그의 소꿉친구 미도리야 이즈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거. 그는,
'뭐, 뭐, 뭐?! 캇쨩, M...!'
'그 이상 말하면 죽인다.'
M이다.
'그리고 너 이 새끼. 뭘 그렇게 쳐 놀라고 지랄이야? 죽인다.'
'아니이, 아니. 그게, 좀 놀라서! 캇쨩은 따진다면 당연히 S 쪽일 거라구 생각했거든.'
미도리야의 말대로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바쿠고 카츠키는 진성 도M이다. 패 버린다느니 때려 주겠다느니 버럭거리기 일쑤지만 사실은 맞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고.
그리고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건데, 바쿠고는 스팽킹에 패티쉬가 있다. 물론 당하는 쪽.
사귀는 사이이고, 섹스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님에도 바쿠고는 아직 자신의 성적 취향을 토도로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직접적이 아니었어도 한 번 말하긴 했다. 예전에는 참을 만 했는데 잠자리가 지속될수록 제대로 된 쾌감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결국 말해 버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도로키가 제대로 못 알아 들었으므로 그냥 말한 적 없는 걸로.
바쿠고는 그 때의 일만 떠올리면 수치스러움과 분함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 견딜 수가 없다. 갑자기 훅 끼쳐온 그 생각에 지나치게 떨어대서, 키리시마가 화장실 가고 싶냐고 물어 등에 화상을 입혀준 전과도 있다.
일주일 전 쯤이었나.
'야, 쇼토.'
'응?'
'나..., 때려줘. 엉덩이.'
앞서 말했지만 토도로키는 사랑이 가득한 조련사다.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게다가 불행하게도 자발적으로 S를 자처할 마음이 없었던 토도로키는 아무 말 없이 바쿠고의 엉덩이를 때렸다
'.......'
'아파?'
고 하면 바쿠고가 길길이 날뛸 테니 두드린다는 표현을 쓰는 게 낫겠다. 통통, 확실히 이건 아니다 싶은 효과음이 침실에 떠다니고 있을 것 같았다. 바쿠고는 아무 말 없이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하루에 대략 열 다섯 번씩 멍청하다고 구박을 받는 카미나리가 본다 해도 더 때려 달라 교태 부리는 모양새로 보일 텐데, 토도로키는 대답을 않는 것이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조금 더 힘을 빼고 통통. 이대로는 무리라고, 바쿠고는 기분 좋냐며 귓가에 속삭이는 토도로키를 무시한 채 생각했다.
그 날부터 바쿠고는 무언가를 계획했다.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시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바쿠고는 생각했고 그것은 굉장히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며칠 동안 준비를 단단히 끝마치고서 아주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바쿠고는,
"살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어? 어. 아직 출판 안 됐나봐. 없네. 가자."
서점에서 스팽킹 책을 구입했다.
토도로키의 취미는 고상하게도 독서. 꽤 오랜 시간 함께한 터라 닮아가는지 바쿠고 역시 책 읽기를 즐겨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자주 집 근처 서점에 가는데, 그 타이밍을 이용하려 했던 거다.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계산하려고 책들을 카운터에 올려 놓은 순간 등 뒤에 아슬아슬하게 숨겨 놓았던 <초보자가 배우는 스팽킹 : 올바른 입문이 중요하다>를 꺼내 그 사이에 숨겼다. 토도로키는 서점에서 내내 이상했던 바쿠고의 거동에 조금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는데, 바쿠고는 이 때 처음으로 애인이 눈치가 없다는 데 감사했다.
토도로키의 시선을 분산시켜 무사히 계산을 마치고 품 속에 책을 숨겨 집으로 돌아온 바쿠고는, 그것을 토도로키의 책장에 몰래 꽂아 두었다. 이로써 미션 컴플리트. 이후의 일은 토도로키에게 달렸다. 어서 그 책을 읽고 스팽킹의 세계에 눈을 떠라, 반쪽이 자식. 애인 속이나 썩이고 말야.
하지만 바쿠고는 알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토도로키 덕에 계속 썩어갈 자신의 속을, 그 불행한 미래를.
가엾게도 토도로키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가만히 놔두면 영원히 안 읽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쿠고가 자존심 때문에 눈에 띄는 곳에 놔두지는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 그러나 결국 섹스에 대한 불만이 그 자존심을 이겨, 바쿠고는 책의 위치에 손을 대었다. 딱 한 칸. 그나마 남은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 프라이드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날에도 토도로키는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네 얼굴이나 하루 종일 보고 있을래, 지금은 먹힐 리 없는 스윗한 그 한 문장에 바쿠고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같이 책 읽자고 꼬드겨 책장 앞에 세웠건만 토도로키의 손에 들린 책은 <세기의 넘버 원 히어로 올마이트>. 장난하냐? 장난해? 위인전 읽을 나이냐, 이 새끼야? 바쿠고는 부글대는 속을 부여잡고 책을 고르는 척 그 스팽킹 도서를 한 칸 더 옮겨놨다. 이제는 보겠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스팽킹 책은 조금씩 자리를 바꾸었다. 결국 토도로키가 흘긋 봐도 눈에 띌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와 버린 책. 토도로키는 그제야 그것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런 게 있었나. 중얼거림과 함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책에 닿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쿠고는 뻣뻣이 굳은 채 심장이 마구 뛰어 다니는 것을 느끼면서도, 토도로키의 고운 손과 책이 알게 모르게 어우러지는 게 야하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흠."
"뭐, 뭔데 그래."
"잘못 샀나 본데. 버려야겠다."
발개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식는다. 바쿠고는 책을 든 토도로키의 손목을 다급하게 쥐더니 더듬거리며 만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기색이 짙었다.
"그, 아니, 그래도! 놔 두면 쓸 데가 있지 않겠냐."
"글쎄."
"아깝잖아! 책을 막 버리다니, 환경을 생각해라!"
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언성까지 높이는 바쿠고에 토도로키는 얼굴 한 가득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토도로키의 표정을 보니, 책을 도로 꽂으면서도 여전히 미심쩍어 하는 듯 했다.
조금 티가 났나 싶었지만 바쿠고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전 날에도, 그 전 날에도, 심지어 또 그 전 날까지 서점에 가서 스팽킹 관련 도서를 전부 탐색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책으로 미리 골라 놓은 건데 감히 버리려 하다니. 뭐, 덕분에 토도로키가 그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으니 잘 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카츠키, 우리 이거 해 볼까."
정말로 그 일이 계기였던 걸까, 마침내 사흘 뒤 토도로키의 입에서 바랐고 바라왔고 바라고 있던 말이 나왔다.
그, 그래? 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얼굴이 활짝 폈는데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는 바쿠고를 토도로키는 빤히 바라보았다.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작전 외의 사항이었지만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히 꽂혀 있던 책을 바쿠고 없는 외로운 집 안에서 토도로키는 펼쳐 보았다. 그 책을 발견한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첫 페이지, 토도로키는 알 수 없는 숫자와 직면했다. 37, 69, 153. 눈을 꿈뻑이며 그 세 개의 숫자를 하염없이 읽기만 하던 토도로키는 혹시, 하는 생각에 37 페이지를 펴 보았다.
"스팽킹 도구의 종류."
그리고 69 페이지.
"스팽킹 강도에 따른 쾌감."
마지막으로 153 페이지.
"스팽킹 하기 편한 자세."
하나하나 챕터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 보고서 153 페이지와 154 페이지에 걸쳐 여러 자세로 엉켜 있는, A와 B로 이름 붙여진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토도로키는 발견했다. A가 B의 어깨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세 옆에 별표가 세 개 쳐져 있는 것을. 69 페이지로 돌아가자 길게 그려져 있는 표, 중과 강 사이 어느 부분의 자그만 하트. 토도로키의 손이 바쁘게 책장을 넘긴다. 37 페이지의 수많은 도구들 중 붉은 채찍에 동그라미가 겹겹이. 토도로키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알겠다. 굳이 엉덩이를 때려 달라고 했던 이유를, 갑자기 서점에 가서 아무것도 사지 않은ㅡ사실은 사지 않은 척이지만ㅡ 이유를, 이 책이 대뜸 나타났고 버리려던 것을 막았던 이유를. 퍼즐이 딱딱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토도로키는 전 날 책상에 놓여 있던 채찍과 패들에 출처를 묻자 부록이 아니냐며 화들짝 놀라던 귀여운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서 하루종일 그 책을 정독한 결과, 바쿠고에게 스팽킹의 의사를 물은 것이다. 바쿠고가 스팽킹에 정신이 팔려 하나 간과한 사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토도로키에게 들키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왕 할 거 제대로 된 스팽킹을 즐겨 보자는 욕망에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렇게 체크를 해 두면 들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생각까지 아직 미치지 못한 채였으니 설렘만이 바쿠고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전 성공을 자축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바쿠고는 바지와 속옷을 재빠르게 벗어 제꼈다. 마음 속에 한 가득 자리잡아 얼굴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기대를 숨기고자 바쿠고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 엉덩이에 닿는 채찍의 감촉.
"할게."
"...응."
바쿠고의 숨이 거칠어진다. 아무래도 조금 긴장한 모양이었다. 토도로키가 바쿠고의 엉덩이 한 쪽을 세게 틀어쥐고, 채찍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쿠고는 눈을 꾸욱 감았다. 그리고,
톡.
"...장난하냐?"
"응? 왜?"
바쿠고는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분노를 넘어 어이가 없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저번과 다를 게 없다. 달라진 거라면 손에 채찍을 들었다, 그 정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와? 서러움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바쿠고는 코를 훌쩍이더니 베개를 꼭 쥐어잡고 엉덩이를 살살 흔들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그런 의미. 토도로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아 바쿠고는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토도로키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다는 느낌으로 베개를 우그러뜨렸다. 그러나 순간, 예고 없이 엉덩이를 강하게 내리치는 것에 베개를 붙든 손에서 힘이 풀린다.
연애의 시작부터 이 년, 바쿠고의 갈망이 실현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 동거물
* 스팽킹
토도로키 쇼토는 얼간이다. 아니, 정정하겠다. 존나 엄청난 얼간이다. 섹스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주제에 옆구리나 쿡쿡 찔러대고. 녀석의 테크닉이라던가 지속력이라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나의 섹스 스타일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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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로키 쇼토와 바쿠고 카츠키는 연인 사이다. 웅영 시절 매일 같이 폭주하던 난봉꾼 바쿠고를 어찌저찌 길들여 그의 연인이 된 토도로키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조련사 따위의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토도로키는 마음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랑만 가득한 조련사. 일 년 가까이 동거 중인데도 바쿠고의 간절한 눈빛을 읽어낼 줄 모르니 사실상 자격 실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에 앞서 우선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 바쿠고에게는 그의 소꿉친구 미도리야 이즈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거. 그는,
'뭐, 뭐, 뭐?! 캇쨩, M...!'
'그 이상 말하면 죽인다.'
M이다.
'그리고 너 이 새끼. 뭘 그렇게 쳐 놀라고 지랄이야? 죽인다.'
'아니이, 아니. 그게, 좀 놀라서! 캇쨩은 따진다면 당연히 S 쪽일 거라구 생각했거든.'
미도리야의 말대로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바쿠고 카츠키는 진성 도M이다. 패 버린다느니 때려 주겠다느니 버럭거리기 일쑤지만 사실은 맞는 것에 취미가 있었다고.
그리고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건데, 바쿠고는 스팽킹에 패티쉬가 있다. 물론 당하는 쪽.
사귀는 사이이고, 섹스도 한두 번 해본 게 아님에도 바쿠고는 아직 자신의 성적 취향을 토도로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직접적이 아니었어도 한 번 말하긴 했다. 예전에는 참을 만 했는데 잠자리가 지속될수록 제대로 된 쾌감을 얻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결국 말해 버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도로키가 제대로 못 알아 들었으므로 그냥 말한 적 없는 걸로.
바쿠고는 그 때의 일만 떠올리면 수치스러움과 분함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 견딜 수가 없다. 갑자기 훅 끼쳐온 그 생각에 지나치게 떨어대서, 키리시마가 화장실 가고 싶냐고 물어 등에 화상을 입혀준 전과도 있다.
일주일 전 쯤이었나.
'야, 쇼토.'
'응?'
'나..., 때려줘. 엉덩이.'
앞서 말했지만 토도로키는 사랑이 가득한 조련사다.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게다가 불행하게도 자발적으로 S를 자처할 마음이 없었던 토도로키는 아무 말 없이 바쿠고의 엉덩이를 때렸다
'.......'
'아파?'
고 하면 바쿠고가 길길이 날뛸 테니 두드린다는 표현을 쓰는 게 낫겠다. 통통, 확실히 이건 아니다 싶은 효과음이 침실에 떠다니고 있을 것 같았다. 바쿠고는 아무 말 없이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하루에 대략 열 다섯 번씩 멍청하다고 구박을 받는 카미나리가 본다 해도 더 때려 달라 교태 부리는 모양새로 보일 텐데, 토도로키는 대답을 않는 것이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조금 더 힘을 빼고 통통. 이대로는 무리라고, 바쿠고는 기분 좋냐며 귓가에 속삭이는 토도로키를 무시한 채 생각했다.
그 날부터 바쿠고는 무언가를 계획했다. 그리고 며칠 뒤 드디어 시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바쿠고는 생각했고 그것은 굉장히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며칠 동안 준비를 단단히 끝마치고서 아주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바쿠고는,
"살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어? 어. 아직 출판 안 됐나봐. 없네. 가자."
서점에서 스팽킹 책을 구입했다.
토도로키의 취미는 고상하게도 독서. 꽤 오랜 시간 함께한 터라 닮아가는지 바쿠고 역시 책 읽기를 즐겨 하게 되었다. 그래서 둘은 자주 집 근처 서점에 가는데, 그 타이밍을 이용하려 했던 거다.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계산하려고 책들을 카운터에 올려 놓은 순간 등 뒤에 아슬아슬하게 숨겨 놓았던 <초보자가 배우는 스팽킹 : 올바른 입문이 중요하다>를 꺼내 그 사이에 숨겼다. 토도로키는 서점에서 내내 이상했던 바쿠고의 거동에 조금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는데, 바쿠고는 이 때 처음으로 애인이 눈치가 없다는 데 감사했다.
토도로키의 시선을 분산시켜 무사히 계산을 마치고 품 속에 책을 숨겨 집으로 돌아온 바쿠고는, 그것을 토도로키의 책장에 몰래 꽂아 두었다. 이로써 미션 컴플리트. 이후의 일은 토도로키에게 달렸다. 어서 그 책을 읽고 스팽킹의 세계에 눈을 떠라, 반쪽이 자식. 애인 속이나 썩이고 말야.
하지만 바쿠고는 알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토도로키 덕에 계속 썩어갈 자신의 속을, 그 불행한 미래를.
가엾게도 토도로키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가만히 놔두면 영원히 안 읽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쿠고가 자존심 때문에 눈에 띄는 곳에 놔두지는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 그러나 결국 섹스에 대한 불만이 그 자존심을 이겨, 바쿠고는 책의 위치에 손을 대었다. 딱 한 칸. 그나마 남은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 프라이드 역시 얼마 가지 못했다. 다음 날에도 토도로키는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네 얼굴이나 하루 종일 보고 있을래, 지금은 먹힐 리 없는 스윗한 그 한 문장에 바쿠고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같이 책 읽자고 꼬드겨 책장 앞에 세웠건만 토도로키의 손에 들린 책은 <세기의 넘버 원 히어로 올마이트>. 장난하냐? 장난해? 위인전 읽을 나이냐, 이 새끼야? 바쿠고는 부글대는 속을 부여잡고 책을 고르는 척 그 스팽킹 도서를 한 칸 더 옮겨놨다. 이제는 보겠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스팽킹 책은 조금씩 자리를 바꾸었다. 결국 토도로키가 흘긋 봐도 눈에 띌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와 버린 책. 토도로키는 그제야 그것의 존재를 깨달았다.
이런 게 있었나. 중얼거림과 함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책에 닿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쿠고는 뻣뻣이 굳은 채 심장이 마구 뛰어 다니는 것을 느끼면서도, 토도로키의 고운 손과 책이 알게 모르게 어우러지는 게 야하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흠."
"뭐, 뭔데 그래."
"잘못 샀나 본데. 버려야겠다."
발개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식는다. 바쿠고는 책을 든 토도로키의 손목을 다급하게 쥐더니 더듬거리며 만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기색이 짙었다.
"그, 아니, 그래도! 놔 두면 쓸 데가 있지 않겠냐."
"글쎄."
"아깝잖아! 책을 막 버리다니, 환경을 생각해라!"
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언성까지 높이는 바쿠고에 토도로키는 얼굴 한 가득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토도로키의 표정을 보니, 책을 도로 꽂으면서도 여전히 미심쩍어 하는 듯 했다.
조금 티가 났나 싶었지만 바쿠고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전 날에도, 그 전 날에도, 심지어 또 그 전 날까지 서점에 가서 스팽킹 관련 도서를 전부 탐색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책으로 미리 골라 놓은 건데 감히 버리려 하다니. 뭐, 덕분에 토도로키가 그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으니 잘 된 일인가 싶기도 하고.
"카츠키, 우리 이거 해 볼까."
정말로 그 일이 계기였던 걸까, 마침내 사흘 뒤 토도로키의 입에서 바랐고 바라왔고 바라고 있던 말이 나왔다.
그, 그래? 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얼굴이 활짝 폈는데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는 바쿠고를 토도로키는 빤히 바라보았다.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작전 외의 사항이었지만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히 꽂혀 있던 책을 바쿠고 없는 외로운 집 안에서 토도로키는 펼쳐 보았다. 그 책을 발견한지 이틀 뒤의 일이었다.
첫 페이지, 토도로키는 알 수 없는 숫자와 직면했다. 37, 69, 153. 눈을 꿈뻑이며 그 세 개의 숫자를 하염없이 읽기만 하던 토도로키는 혹시, 하는 생각에 37 페이지를 펴 보았다.
"스팽킹 도구의 종류."
그리고 69 페이지.
"스팽킹 강도에 따른 쾌감."
마지막으로 153 페이지.
"스팽킹 하기 편한 자세."
하나하나 챕터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 보고서 153 페이지와 154 페이지에 걸쳐 여러 자세로 엉켜 있는, A와 B로 이름 붙여진 두 사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토도로키는 발견했다. A가 B의 어깨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세 옆에 별표가 세 개 쳐져 있는 것을. 69 페이지로 돌아가자 길게 그려져 있는 표, 중과 강 사이 어느 부분의 자그만 하트. 토도로키의 손이 바쁘게 책장을 넘긴다. 37 페이지의 수많은 도구들 중 붉은 채찍에 동그라미가 겹겹이. 토도로키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알겠다. 굳이 엉덩이를 때려 달라고 했던 이유를, 갑자기 서점에 가서 아무것도 사지 않은ㅡ사실은 사지 않은 척이지만ㅡ 이유를, 이 책이 대뜸 나타났고 버리려던 것을 막았던 이유를. 퍼즐이 딱딱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토도로키는 전 날 책상에 놓여 있던 채찍과 패들에 출처를 묻자 부록이 아니냐며 화들짝 놀라던 귀여운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서 하루종일 그 책을 정독한 결과, 바쿠고에게 스팽킹의 의사를 물은 것이다. 바쿠고가 스팽킹에 정신이 팔려 하나 간과한 사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토도로키에게 들키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왕 할 거 제대로 된 스팽킹을 즐겨 보자는 욕망에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렇게 체크를 해 두면 들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생각까지 아직 미치지 못한 채였으니 설렘만이 바쿠고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전 성공을 자축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바쿠고는 바지와 속옷을 재빠르게 벗어 제꼈다. 마음 속에 한 가득 자리잡아 얼굴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기대를 숨기고자 바쿠고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 엉덩이에 닿는 채찍의 감촉.
"할게."
"...응."
바쿠고의 숨이 거칠어진다. 아무래도 조금 긴장한 모양이었다. 토도로키가 바쿠고의 엉덩이 한 쪽을 세게 틀어쥐고, 채찍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쿠고는 눈을 꾸욱 감았다. 그리고,
톡.
"...장난하냐?"
"응? 왜?"
바쿠고는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분노를 넘어 어이가 없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저번과 다를 게 없다. 달라진 거라면 손에 채찍을 들었다, 그 정도.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와? 서러움이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바쿠고는 코를 훌쩍이더니 베개를 꼭 쥐어잡고 엉덩이를 살살 흔들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그런 의미. 토도로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비웃음과도 같아 바쿠고는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토도로키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다는 느낌으로 베개를 우그러뜨렸다. 그러나 순간, 예고 없이 엉덩이를 강하게 내리치는 것에 베개를 붙든 손에서 힘이 풀린다.
연애의 시작부터 이 년, 바쿠고의 갈망이 실현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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