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 키?”
“…….”
“뭐, 뭐하는 거야. 손 내려. 당장, 손 내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단호한 척 명령을 내리는 꼴이 우습다.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이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 대어져 있던 칼날은 조금 더 손목에 파고든다. 짓눌리며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거부하던 피부가 결국은 찢기고, 피가 붉게 배어 나온다.
다가오지 마. 죄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을 향해 바쿠고는 툭 내뱉었다. 바닥에서 급히 떼어지던 발꿈치가 멈칫. 바쿠고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 예쁜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한 가득이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흐를 것 같아 토도로키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입술을 잘게 씹었다. 칼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손등에 선 힘줄로 알아차린 토도로키가 속삭였다. 희미한 목소리였다.
“하지 마….”
“하?”
“제발, 부탁이야. 하지 마. 카츠키, 응? 칼 내려놔, 내려놔줘.”
여전히 그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는 듯해, 억지로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서 힘을 뺀다. 주저앉듯 무릎을 꿇은 토도로키가 무릎 위에 꽉 쥔 주먹을 올려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손등에 눈물방울이 닿아 뭉개져서는 번져 흐른다. 하, 라는 대로, 다, 다, 할게. 해 달라, 는, 거. 전부.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죽지 말아줘.”
여태껏 그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무감각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저 서 있기만 하던 바쿠고가, 애처롭게 뱉어진 말에 조소를 터뜨렸다.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지금 이 순간조차 사랑하고 있는 연인을 내려다보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작게 벌어진 바쿠고의 입술 새로 물음 하나가 흘러나온다.
“뭐든?”
“응, 응. 뭐든.”
“그럼 네가 죽여.”
고개를 들었다. 다시 표정을 지운 얼굴이 토도로키와 시선을 정확히 맞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입술이 움직이며 말을 만들어 낸다. 네가, 죽여. 말을 멈춘 순간 솟구쳐 오른 울음에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며 묻는다. 내가? 바쿠고는 대답 대신 바닥에 칼을 집어 던진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는다.
“날 도와.”
“…….”
“내 죽음을 도와, 쇼토.”
눈물이 멎는다. 토도로키는 멍하니 핏빛 눈동자만을 바라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비틀린 계약의 성립이었다.
[토도바쿠] 撚(비틀 연)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 연인의 죽음을 소망할 이 대체 누가 있겠는가. 그것에는 그를 지독히도 사랑한다는 것 말고, 이유를 하나 더 꼽을 수 있다. 바쿠고 카츠키, 그가 세간에서 칭송받는 넘버 원 히어로라서? 토도로키는 물론 히어로다만,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하며 바칠 각오로 달려든 적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남을 위하는 법을 아는 이가 아니다.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음에도 여전히 어리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 이유. 바쿠고가 자살의 길을 선택하려는 이유가 빌어먹을 미도리야 이즈쿠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쿠고는 여태껏 넘버 원 히어로 타이틀을 따기 위해 달려왔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유명하고, 누구보다 떠받들어지는. 체육대회 때 최고 순위를 차지함으로써 절대적인 평가로 인정받는 넘버 원 히어로가 되기를 바랐다.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는 조바심이 몰래 자리 잡고 있었다. 가끔은 철창을 뚫고 튀어 나오려는 불안감을 눈치 채고 너무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된다 말하며 뺨을 쓰다듬으면, 바쿠고는 지친 눈을 잠시 감고 자신은 아직 부족하기에 멀었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토도로키는 그 말이 싫었다. 객체가 빠진 그 말, 나는 아직 부족해. 나는 아직, 데쿠 새끼보다 한참 뒤떨어지니까. 데쿠, 그 놈의 데쿠. 바쿠고의 머릿속, 자신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는 미웠다.
월말 히어로 정산. 유치하기 짝이 없는 TV 프로그램을 토도로키의 집에서 모여 시청한 적이 있었다. 보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니었고, 심심하다고 칭얼대는 카미나리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튼 TV에서 우연치 않게 그것이 나왔을 뿐이다. 발표는 1위와 2위만 남았다고. 히어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미나리는 그 둘 중 하나일 리는 없을 자신의 순위를 놓쳐서 아쉽다고 투덜댔다. 네 녀석은 어떻게 TV를 틀어도 시끄럽냐고 바쿠고가 짜증을 냈다.
여자 MC는 억지로 꾸며낸 웃음을 방긋방긋 내보이며 큐 카드를 흘끔거렸다. 토도로키는, 바닥에 앉은 바쿠고의 바로 뒤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어떤 표정도 없이 무감각하게 TV 속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생각했다 : 저 여자 싸구려 코 세웠네.
두근두근!
무슨 두근두근, 인마. 당연히 1위는 나 아니겠어?
토도로키는 그 말에서 모순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으니까. 뒤처질까봐 밀려날까봐 잔뜩 겁을 먹고, 일이 없는 날이면 몸을 혹사시킬 만큼 훈련에 매진하던 바쿠고를. 그것은 그 스스로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는 미도리야 이즈쿠 때문. 호들갑을 떠는 카미나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그렇게 으스대듯 말하는 그 모습이, 토도로키에게는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MC는 과장된 모션과 목소리 톤으로 방청객들의 반응을 유도했다. 월말 히어로 정산 TOP 10, 이제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아마 바쿠고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1위, 데쿠. 그것이 발표되면 괜히 화가 난 척을 해 미도리야를 골려주고, 상냥하지 못한 축하의 말을 건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번쩍번쩍 눈이 아프게 돌아가는 TV 화면에 결국 나타난 얼굴은,
그럴 줄 알았어. 캇쨩은 대단하니까.
축하한다, 바쿠고!
…아, 어.
짜아식, 대단한걸!
달려들어 제 목을 끌어안는 카미나리에게 별다른 욕설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쿠고는 TV 화면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1위, 폭살왕. 폭살왕의 얼굴은 분명 자신이었다. 바쿠고 카츠키였다.
TV 화면을 가린 채 바쿠고의 앞에 앉아버린 키리시마가 바쿠고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양 옆으로 흔들었다. 1위 한 게 그렇게 좋아? 놔라. 키리시마 탓에 상황 파악이 조금 된 건지 날카롭게 대꾸한 바쿠고가, 잠시 망설이더니 미도리야를 부른다. 그 부름은 자칫 묻힐 뻔했다. 2위를 발표하는 경쾌한 목소리가 집 안을 메웠기 때문이었다.
미도리야가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운 채로 바쿠고를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째선지 바쿠고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냐.
뭐가?
1위.
별다른 설명 없이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 바쿠고에, 조금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미도리야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곧 답을 내놓았다. 당연하지. 나보다 캇쨩이 훨씬, 훨씬 대단한걸! 바쿠고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아첨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생각하는 그대로 말했을 뿐. 그리고 사실이잖아? 미도리야는 여전히 오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바쿠고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 그리고, 2위도 못 했잖아.
아무래도 미도리야는 연계 위주니까.
바쿠고는 그에 무어라 대답하려 했는지 입을 벌렸지만 미도리야와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불쑥 끼어든 키리시마에 아무 말도 꺼내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닫힌다. 미도리야는 잠시 바쿠고의 눈치를 보지만, 바쿠고처럼 폭발적인 머리도 없지 않냐며 낄낄대는 키리시마에 곧 웃음을 터뜨린다.
키리시마, 겉모습을 가지고 사람을 놀리면 안 되는 거다!
놀린 거 아니거든요.
갑자기 이이다와 키리시마의 만담 판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에 미도리야에게서 시선을 떼며, 바쿠고 역시 조금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행복의 징표가 아니다.
맞다. 맞았다. 히어로란 직업군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대중들의 눈도, 아니, 대중들의 눈이 중요하다. 화려할수록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외관도, 성격도, 개성도 평범하다고는 못할 폭살왕이 당연히 데쿠보다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게다가 키리시마가 말했듯 미도리야는 연계형 히어로. 바쿠고와 자주 페어를 이루어 빌런을 잡아들이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주로 담당하는 쪽은 바쿠고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사회공헌도가 높은 바쿠고가 이길 수밖에.
어쨌든 축하해, 캇쨩.
됐… 고맙다.
한 턱 쏴! 한 턱 쏴!
시끄러워, 인마.
축하한다는 말 속에서 남모르게 죽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에서, 토도로키는 마치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갑자기 폭 꺼져버리는 형상을 본 듯 했다. 혹시, 머지않았나? 지금부터 너는 서서히 죽어가게 될 것인가? 네 동경을 뛰어넘은 탓에?
토도로키, 바쿠고가 쏜다는데 뭐 먹고 싶어?
야, 내가 언제!
상관없어. 아무거나.
평소처럼 다정한 말투, 토도로키의 표정은 여전히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있었다.
구구절절 말했으나 토도로키가 바쿠고의 죽음을 원치 않아하는 이유는, 그가 히어로의 길을 택한 이유와 같다. 다만 토도로키 그만의 욕심일 뿐이라는 것. 바쿠고의 생각 전부가 자신에게 쏠리길 바라는 것. 다른 이 때문에 삶의 중대사, 아마 가장 크고 두려운 일일 죽음을 선택하는 게 싫었다. 살아 있는 바쿠고의 머릿속에 담겨져 있는 미도리야도 싫었지만, 바쿠고의 끝을 미도리야로 내기는 싫었다.
그래서인지 토도로키에게 바쿠고의 제안 아닌 제안은 반가울 지경이었다. 괴롭고, 숨이 막히고, 아프지만, 미도리야로 인해 네가 너를 죽이는 것보다는 너로 인해 내가 너를 죽이는 게 나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비틀린 마음을 따를 뿐이다.
***
“일주일. 그 이상은 안 돼.”
“그래.”
대신 그 일주일은, 전부 나만을 위해 써줘. 바쿠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기도 하였다. 죽음을 도와줄 애인과, 죽음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죽음까지 당연히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웃는 법을 잊은 건 아닐까 걱정하게 만들었던 얼굴이 그제야 희미하게 웃는다.
토도로키는 새하얀 종이 위에, 새까만 잉크 펜으로 단정한 글씨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장 위 중앙에 'list'라는 글자, 그 옆에 온점을 찍어 마무리한 토도로키의 손에서 바쿠고는 펜을 빼앗아 들었다.
1. 영정사진 찍기
“…되게 그런 것부터 쓰네.”
“그런 게 뭔데?”
그런 것.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토도로키 역시 무엇인지 몰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그런.
그래서 그는 대답을 회피하고 화제를 돌려 버렸다. 여전히 글씨는 되게 못 쓰는군. 고운 말로 대해줄 수 없느냐 자주 싸웠던 주제에, 괜히 평소처럼 그의 난폭한 말이 듣고 싶어 괜히 시비를 걸어본다.
“죽어라.”
즉각 돌아오는 대답은 눈물이 나올 만큼 만족스럽다.
괴발개발 날려 쓴 글씨ㅡ바쿠고 딴에는 잘 쓴 것일 수도 있겠으나ㅡ 옆 공백에, 다시 펜을 손에 쥔 토도로키가 작게 괄호를 쳤다. 이게 뭐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 바쿠고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실행 여부. 바쿠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토도로키의 어깨에 뺨을 기댄다. 2번. 바쿠고의 입술 새로 뭉그러진 발음이 흘러나온다. 토도로키는 묵묵히 숫자를 적었다.
바쿠고를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일주일 남았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가 죽음에 닿으려는 모습까지 보았으면서도.
***
첫 날.
“야.”
“쇼토.”
“…그래, 쇼토. 나 옷 사는 거 지금 할래.”
토도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트 중 하나, 마지막 순간에 입을 옷 사기. 앞장 서 자신이 고른 옷가게에, 답지 않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가는 뒷모습을 토도로키는 그 자리에 멈추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빨리 일을 해치우고 싶다며 1번부터 처리하겠노라, 영정 사진을 오늘 당장 찍어야겠다고 바쿠고는 토도로키를 꼭두새벽부터 깨워댔다. 환히 웃는 채로 사진에 찍히는 예쁜 얼굴을 보며 시큰거리는 코에 눈물을 참느라 온갖 애를 썼건만, 마지막 옷이라. 본인이 찍는 것이 영정 사진인 줄도 모르고 넘버 원 히어로의 사진을 찍게 돼 영광이라고 웃던 사진사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토도로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뜨고는 옅게 웃는 낯을 만들었다. 평소처럼만. 평소처럼만. 내내 주문처럼 되뇌던 말을 두 번 더 읊고는 토도로키 역시 바쿠고를 따라 가게로 향했다.
괜히 그 가게에 가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진열된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으로 하고 싶다고 점원에게 이야기하는 바쿠고를 뒤늦게 도착한 토도로키가 말렸다. 조금 더 보고 결정해. 바쿠고는 완강했다. 첫 눈에 반한 옷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바쿠고에 토도로키가 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점원에서 묻기를 : 저 구성으로 두 벌 살 수 있을까요?
“왜 두 벌이야. 하나면 돼.”
“내 거야.”
“아, 싫어. 왜 너랑 똑같은 거 입어야 하는데.”
투덜거리는 바쿠고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고서, 토도로키는 옷을 가지러 간 점원에게 들리지 않게 소근소근 속삭였다. 마지막 커플티잖아. 바쿠고는 갑자기 훅 끼쳐온 이질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은 여전히 사납게 토도로키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울적함 그 자체였다. 연인이 말한 ‘마지막’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인지, 아니면 토도로키가 슬픔 자체가 되었는지.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방해한 것은 그들 사이에 들이밀어진 쇼핑백이었다.
토도로키가 그것을 받아들고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점원이 카운터로 간 사이 토도로키가 바쿠고의 귀에, 무언가 아주 특별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입술을 바싹 붙였다. 간지러워, 새끼야. 투덜거리면서도 바쿠고는 자그마한 음성에 집중했다.
“우리… 바다 보러 가자.”
“바다?”
“응. 이 옷 입고.”
이 옷은 그 순간만을 위한 것이라 반박하려던 바쿠고는,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별 것도 아닌데 귓속말은. 짜증을 내며 밀어내자 토도로키는 그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놓고, 저들에게 가까워진 구두 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다정하고 인위적인 미소가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기도 해 바쿠고는 조금 안심했다. 무엇을 불안해하고 있었는지 저 자신도 몰랐으면서.
둘째 날.
마음이 약해지면 몸도 덩달아 힘을 잃는지, 어제 새벽부터 방방대던 체력을 전부 소진해 버린 바쿠고는 오후 두 시쯤 비몽사몽 일어나 통보하듯 말했다. 바다는 내일 가자.
토도로키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더니, 그 말의 뜻을 이해한 순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기대했는데. 피곤해. 딱 잘라 말하는 것에 한숨이 길게 따라온다. 바쿠고는 못 들은 척 한다. 고개가 깊이 숙여진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리고서 바쿠고와 시선을 마주한다. 조금 아쉽지만 자는 바쿠고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시간이 남았으니.
“그럼 오늘은?”
“집에서 할 수 있는 거.”
“짐 정리?”
“뭐, 그래.”
제 품에 기대어, 어리광처럼 가슴팍에 뺨을 부비는 이의 허리를 토도로키가 한 팔로 감싸 안고 고개를 숙여 뺨에 두 번 입을 맞췄다. 언제나 보들보들했던 뺨이 조금 까칠까칠. 토도로키는 이것도 마음고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심란해졌으나 티내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쿠고가 손을 뻗어 토도로키의 옷자락을 쥐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바쿠고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곧 아침에 아이가 되어 깨어나지 못할 잠에 들겠지. 토도로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생각을 흩트리기 위함이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뭐하냐.”
잠에서 더 깨어났는지 또렷해진 목소리가 물었다. 토도로키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젓고는 여전히 제 옷을 움킨 손을 감싸 쥐고 당겼다. 일어나, 씻고 밥부터 먹자. 바쿠고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침대 위에 섰다. 토도로키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쿠고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으쌰. 그를 들어 올리자 코알라처럼 매달려온다.
“무거워.”
“죽는다.”
사실은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전과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그 우울한 말을 토도로키는 목 뒤로 삼켰다.
셋째 날.
의외로 많았던 바쿠고의 짐을 전부 늘어놓고 하나하나 정리하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한 둘은 바다는 다음 날에 가기로 합의했다. 오전 열한 시, 생각보다 일찍 깨어난 바쿠고는 앉은 채로 어제 둘이 어지럽힌 거실을 멍하니 둘러보고, 제 옆에서 널브러져 자고 있는 연인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 상황을 봐서는 딱딱한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잠들었던 모양. 어이가 없어ㅡ명색이 히어로라는 것들이 체력이 이 모양이라는 사실에ㅡ 헛웃음을 치고는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고 바쿠고는 일어난 직후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섰다. 오늘은 뭐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잠에서 덜 깨어난 상태의 자신은 귀찮음이 최고점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쿠고는 그 대답을 수락했다.
좋아, 오늘은 홈 데이트. 토도로키와 계약을 맺은 뒤로는 바쿠고의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살고 있지만 바쿠고는 그렇게 대충 이름 붙이고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바쿠고 님 특제 아침을 만들어 주지. 바쿠고는 반팔임에도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고는 테이블 위 식빵 봉지를 집어 들었다.
넷째 날.
“예쁘다.”
“어.”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걸.”
“아직도 꽁해 있냐?”
꽁하다니, 그런 말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기분이 상당히 좋은지 답지 않은 소리를 늘어놓고는 실없이 웃는다. 함께 샀던 옷을, 마지막 날에만 입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는지 단호히 말해오는 바쿠고에 제각각인 옷을 입고 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바쿠고는 그에게는 눈길을 줄 가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둠에 물들어가는 바다만을 바라본다. 토도로키는 그 반응에 조금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고는 바쿠고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정말 조심스러운 손길을 확 붙들었다. 히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는 토도로키의 손을 세게 쥐어 잡으며 바쿠고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지극히 토도로키의 관점이다만 상당히 귀여운 말을 건넸다.
“안 잡아먹으니까 소심하게 굴지 마. 징그러워.”
“잡아먹는 건 나지.”
“미친 새끼가?”
그리고서 대화는 잠시 끊긴다.
발끝까지 다가왔다 사르르 멀어지는 파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던 토도로키가 입술을 달싹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게. 글쎄.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돌아오는 답에 토도로키는 입술을 비죽이다 바쿠고의 손을 아프게 움켰다. 바쿠고는 그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지난 삼 일을, 좀 더 멋지게 보낼걸.”
“…….”
“하는 생각.”
바쿠고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바로 말을 꺼내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를 낸다.
“충분히 멋졌으니까 됐어.”
“그래?”
“너랑. 아오, 씨. 낯간지러워서 못 해 먹겠다.”
“응?”
바쿠고는 아랫입술을 한 번 짓씹더니 몸을 휙 돌려 토도로키의 멱살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놀라 동그랗게 떠진, 각각 다른 빛을 내지만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는 눈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입술을 맞대었다.
제가 부딪어 뭉그러진 입술에 제 입술을 짧게 부비고는 손까지 놓고 뒷걸음질 친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토도로키를, 이번에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대각선에 놓여 있는 모래바닥을 노려본다. 너랑. 바쿠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힘 있게.
“나랑.”
“…….”
“같이 있었으니까. 그걸로 됐잖아.”
“…….”
“아, 안 그러냐.”
돌아오는 말도 행동도 없자 바쿠고는 밀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을 잔뜩 구기고 고개를 팍 들었다. 사람이 말을 했으면…! 그리고 이번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바쿠고는 저를 단번에 당겨 안은 팔에 입을 다물었다. 제 어깨에 파묻은 얼굴이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만 있음을 알고서 그의 허리를 감싼다.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저로선 알 길이 없지만 대강 짐작하여 그 분위기에 맞추려 한다. 몸을 아프게 죄여 숨 막혀, 작게 중얼거리고서 저도 온 힘을 다해 토도로키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이제 그곳에는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바다가 잊을 만큼의 적막과, 파도의 시간만이.
다섯째 날.
“애들을 만나고 싶어?”
“왜?”
“그냥.”
대신 그 일주일은, 전부 나만을 위해 써줘.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혹시나 거절당할까 불안해하던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재생된다. 몇날 며칠을 쉬지 않고 우느라 다 갈라져 버렸던. 바쿠고는 의아한 얼굴로 게임기를 내려놓고 토도로키를 바라봤다. 토도로키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바쿠고는 리모컨을 들었다. TV 화면이 새카매진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냥, 이라고 했잖아.”
웃기고 앉아있네. 바쿠고는 코웃음을 치고는 토도로키의 손에서 게임기를 뺏어들었다. 토도로키가 불만 가득한, 어쩌면 그런 척 하는 표정을 띠웠다. 그러고선 바쿠고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일부러 안 보는 것처럼 꾸며내지만 보지 못하고 있어.
바쿠고는 한 손에 하나씩 게임기를 들고 못마땅한 얼굴로 토도로키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게임기를 옆에 밀어놓고 두 손으로 토도로키의 뺨을 붙들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얼굴이 결국은 바쿠고를 마주하게 된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을 맹렬히 노려보다 바쿠고는 덮치듯 달려들어 입을 맞춘다. 토도로키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놀란 이의 콧등에 다섯 번 연달아 입술을 부빈 뒤 으르렁거리며 시선을 바싹 들이민다. 코끝이 부딪힌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무슨 소리야.”
“너로 충분하니까, 됐다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고서 바쿠고는 제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틀어쥐었던 멱살을 놓는다. 토도로키는 제게 게임기를 건네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어 버렸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바쿠고는 못 본 체 했다.
여섯째 날.
“오늘은 일찍 자자.”
일 분 일 초를 아끼려 들었던 주제에 어째서 이렇게 이른 시각 침대에 누워서는 옆자리를 통통 쳐 대고 있는지 바쿠고는 알 길이 없었지만,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 그곳에 기어 들어갔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서 토도로키는 바쿠고의 가슴을 토닥였다. 자장, 자장. 속삭이듯 저 말만을 반복하는 목소리에 집중하다 바쿠고는 저도 모르는 새 잠에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러나 조금은 일찍 끝맺은 날이었다.
마지막 날.
“같이 씻을까?”
“됐어.”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뒤따라올 세라 후닥닥 욕실에 들어가더니 문을 잠가 버렸다. 달칵이는 소리를 내며 잠겨버린 문에 토도로키는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워 하기는.
토도로키는 소파에 가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입꼬리가 축 가라앉았지만 다시 억지로 끌어올렸다. 지금은 그 생각 하지 않을래. 둘이, 둘이 보내는 마지막… 이것을 사랑이라 표현해도 되나. 하여튼 둘이 보내는 마지막 관계의 시간. 이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다 씻었어?”
“그럼 다 안 씻고 나오냐?”
“뾰족뾰족.”
“뭐, 인마!”
한두 번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정말 부끄러운 건지 일부러 더 툭툭대는 이에 토도로키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이죽거렸다. 바쿠고가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곧 그 기색을 없애며 토도로키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수건 한 장만이 달랑. 토도로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앞에 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그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여 앉는다. 토도로키가 당황한 듯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씻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바쿠고가 조금 더 바싹 당겨 앉아 토도로키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잖냐. 어째선지 이미 잔뜩 발기한 성기를 토도로키의 중심부에 느릿하게 문지르며 뺨에 키스했다. 말캉한 입술이 뺨을 눌렀다 떨어지는 감촉에 잠시 집중했던 그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바쿠고의 입술을 찾아 베어 문다.
어젯밤 오늘을 위해 정돈해 두었다며, 침대를 더럽히기 싫다는 바쿠고의 의견에 따라 소파에서 일을 치룬 둘은 어째선지 몇 년을 써 왔던 이 소파가 오늘따라 불편하다 느끼며 숨을 골랐다. 토도로키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제 허벅지에 놓여 있는 바쿠고의 손을 붙들었다. 같이, 씻을까? 아직도 여운에 젖어 있는지 혹은 힘에 부치는 건지 부자연스러운 숨소리가 섞인 물음. 아까와 같은 질문에 바쿠고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건넸다. 됐어. 그리고서는 씻을 참인지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그의 손목을 토도로키가 붙든다.
“내가 씻겨주고 싶어. …마지막으로.”
바쿠고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늘어뜨렸던 손으로 토도로키의 손목을 잡는다. 서로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 광경을 누군가 보면 비웃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토도로키는 제 손목을 가볍게 당기는 손길을 따라 일어섰다.
“부드럽게 닦는 걸 못해? 바보야?”
“너무 오래 같이 안 씻어서 그래.”
“그럼 다음…”
그리고 대화는 끊겼다. 물기가 남아 있는 몸에 붙어 바싹 당겨진 셔츠에 등이 아팠다. 바쿠고는 말없이 셔츠 끝자락을 내렸다.
토도로키는 묵묵히 바쿠고의 셔츠 단추를 잠갔다. 다음이라는 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더 이상은 할 수는 없는 것. 커플티라고 주장하며 구입한 옷이니 토도로키는 저 역시 그것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그던 단추를 반 정도 남겨두고 제 옷을 집어 든다.
“그만.”
“어?”
“넌 저거 입지 마.”
왜? 토도로키의 눈이 묻는다. 바쿠고는 눈을 깜빡이며 그와 시선을 맞춰 놓기만 하다, 아무렇지 않은 건지 또는 그러는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마음이 이상해질 것 같아. 응. 토도로키 역시 그를 흉내 내듯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역시 흉내일 뿐이었다.
바쿠고는 단추를 마저 잠그고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토도로키도 그를 따랐다. 일주일 그 이상은 토도로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계약서를 작성한 그 때와 정확히 똑같은 시각, 바쿠고는 침대에 누웠다. 준비할 시간은 토도로키에게 여전히 부족했다.
***
“약속 지켜줘서 고맙다.”
“…….”
하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미안해. 작은 속삭임이 토도로키의 귓가를 맴돌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토도로키가 어렵게 말을 떼었다. 나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 굳은살이 박여 딱딱하고 못난 손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무엇보다도 붙잡고 싶은 어여쁜 손이 손짓했다. 토도로키는 그 손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따뜻한 손끝이 차가운 뺨에 닿았다. 사랑해. 토도로키는 그것에 조금 물기가 어려 있진 않은가 생각했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삶의 끝에서도 넌 담담하구나. 역시 넌 강해.
토도로키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바쿠고의 손등을 감싸 쥐고, 제 얼굴에 그의 손바닥을 바싹 당겨 붙였다.
“쇼토.”
“카츠키.”
“사랑해, 많이.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끝에 따라붙을 뻔한, 그러나 차마 건넬 수는 없었던 물음이 입 안을 간질였다. 나의 존재만으로, 내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살기에는 벅찼니. 나는 네 삶의 이유가 되지 못하니. 이 국면에서 미련하고도 이미 늦어버린 질문은 전하지 않기로 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고, 너를 사랑하는 나는 이 손으로 널 놓아줄 것이다.
“…잘 가.”
“응.”
“사랑했어.”
나의 사랑, 카츠키. 너를 위해.
맞잡고 있던 손에서부터 퍼진 냉기가 온 몸으로 스몄다. 순식간이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평생을 열등감 따위에 괴로워했을 그가 마지막까지 힘들어하기는 바라지 않아. 제 몸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린 손만을 잠시 미동 없이 붙들고 있던 토도로키가 속삭였다. 카츠키. 대답은 없었다. 카츠키. 조금 커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연인의 이름을 부른다. 질릴 만큼 불렀었다 생각했는데 어째서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는지.
“사랑해.”
사랑했다는 말로 보내버린 너를, 나는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는데. 내 마음에 어울리는 말은 사랑했어, 가 아닌 사랑해, 인데. 겁이 났던 걸까, 이제는 볼 수 없는 너에게 지금 이 순간마저 진심을 전부 쏟아버리기 무서웠던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침대 위의 바쿠고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서 토도로키는 방을 나섰다. 문을 닫았다. 문에 손을 댄 채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 토도로키는 방문을 얼음으로 뒤덮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그의 마지막은 나만 볼 수 있게.
토도로키는 한참 방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왠지 그와 손을 맞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침을 삼키고 목울대가 일렁이고 머뭇거리던 손이 주먹을 쥐며 떨구어졌을 때, 완전한 이별을 맞이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는 못한 채 뒷걸음질 치다 소파에 걸려 멈춘다. 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저와 바쿠고의 휴대폰이 보인다. 같은 기종. 그 중 하얀 것이 울린다. 바쿠고의 것이었다.
[데쿠]
토도로키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캇쨩, 지금 나와 줘! 수목형 빌런이라…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토도로키는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 아닌 대답을 건네었다. 죽었어.
[토도로키 군?! 너, 너라도 좀. 급해!]
좋지 못한 상황에 머리 회전이 안 되어 이해를 못 했는지 헛소리만 지껄이는 미도리야에게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다시금 방금 전 사실이 된 것을 전한다.
“죽었어.”
[미안한데 지금 뭘 말할 때가,]
“내가 죽였다. 폭살왕을, 내가 죽였어.”
[어, 어? 토도로키 군, 무슨 소리를…!]
몇 번을 되풀이 해 준 지금에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인가. 토도로키는 배려 없는 통보뿐이었던 전화를 끊었다. 미도리야에게 자신이 바쿠고를 ‘죽였다’고 말한 동시에 토도로키는 깨달았다. 결국, 결국 마지막을 ‘나’로 내고 싶다는 욕심이 바쿠고를 죽게 내버려뒀다. 진즉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것이 깊숙이 파고든 것은 처음.
토도로키는 스스로에게 한 번 물었다. 그로 인해 카츠키를 차지했다는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나? 살해. 어째서 그런 식의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 수 없는 말 역시 단 하나, 그것 때문이었던 걸까. 엇나간, 집착.
그렇다면 지금 카츠키를 차지한 기분이 드는가? : 대답도 생각도 할 가치란 없는 질문.
며칠 전 간소하게 챙겨 놓았던 바쿠고의 짐이 담긴 캐리어 손잡이를, 허리를 굽혀 쥐고는 누워 있던 것을 세웠다. 본인은 버려 달라 했으나 전혀 그럴 생각 없다.
바퀴가 끌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으나 휴대폰 두 개에서 울리고 있는 진동 소리가 지나치게 거슬려 미간을 찌푸린다.
집 밖으로 나선 그는 몇 초의 텀도 없이 건물 전체를 냉각시켰다. 어떤 결심이 섰는지는 몰라도, 미도리야와의 전화 이후 무언가 달라진. 오피스텔 내 누가 있든 관심 범위 밖이었다.
눈물이고 슬픔이고 전부 지워버린 얼굴을 하고 얼음으로 울퉁불퉁 덮인 복도를 걷는다. 캐리어가 요란하게 그의 뒤를 따른다.
다시 한 번 맞이하는 완전한 이별이었다.
ㅡ나의 세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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