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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하이큐

[아카쿠로] 열꽃

 

감기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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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줄도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문턱에 엎어져 있었다. 불은 전부 꺼져 있었고 아주 조용했다. 내 숨소리만 온 집 안을 채웠다. 이것을 설명하기엔 조용하다는 말은 뭔가 조금 부족했다. 적막. 적막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했다. 또 그 아저씨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곱게 분칠을 한 엄마가 입술을 빨갛게 칠하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좋은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 넥타이를 매며 툭 물어보니 얘는 뭘 그런 걸 물어보니, 하며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아팠지만 엄마는 꽤 좋아 보였다. 머지않아 아빠가 생기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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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누워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축축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일어서려니 조금 버거웠지만 계속 여기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후들후들 떨리던 다리가 짧은 신음성과 함께 무너졌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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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방 안을 바라보았다. 책상이 바로 보였다. 어젯밤까지는 어지러웠는데, 엄마가 나가기 전에 정리를 한 모양인지 단정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사진 하나. 엄마가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 그대로 놔 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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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들은 전부 흐릿하게 보이는데 그것은 또렷했다. 하도 많이 봐서 절로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새빨간 저지, 엉망진창 세워진 새까만 머리, 나른하게 풀린 새까만 두 눈. 온통 새빨갛고 새까만 사람이 새하얗게 웃고 있다. 뺨에 검지 손가락을 콕 찍고 빙글 웃고 있는 얼굴은 언제나처럼 예쁘다. 예쁘다고 하면 그건 칭찬이 아니라며 투덜대어 이후로 말한 적 없지만, 볼 때마다 예쁘다 생각했던 얼굴. 너무 예뻐서 갖고 싶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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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다 보면 미치도록 그가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전화를 한다. 아카아시군,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말해오는 목소리는 그 얼굴이 상상되게 한다. 아뇨. 보쿠토 상을 대하듯 단호하게 대꾸하지만 그가 볼 수 없는 수화기 너머의 나는 웃고 있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려 가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습관처럼 휴대폰을 찾고 있던 나는 아차 싶어 손을 멈추었다. 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던 손은 무릎 위로 툭, 힘없이 떨어진다. 그가 너무 예뻐서, 사랑스러워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잊고 있었으나 이제 나는 그에게 전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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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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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 상.’

‘어?’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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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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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네.’

‘숨겼으니까요.’

‘미안.’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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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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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카아시군.’

‘네.’

‘조금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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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숨겼어야 하는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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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날 그렇게 봤다는 거.’

‘아.’

‘아, 가 아니라 사과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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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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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과하지 않을 겁니다.’

‘왜.’

‘내가 쿠로오 상을 사랑한 건 잘못이 아니니까요.’

‘아, 그래?’

‘말한 건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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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에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그 장소를 떴다. 그 때 알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쿠로오 상이 나를 보지 못할 때부터 이랬길 바랐다. 그에게 차여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꼴사나우니까.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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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독한 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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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살짝 감고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이 입술을 훑고 퍼졌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낫는다. 상사병은 답도 없다던데.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내가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저런 남자에게 반해서 이러는지.

요새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귀여운 1학년 여학생이었다면. 그러면 나는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서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녀의 우는 얼굴을 봐도 마음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쿠로오 테츠로, 이름만 떠올려도 마음이 저릿저릿하고 무언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면서 동시에 마음 전체가 쿡쿡 쑤셨다. 하지만 너무 좋아한다고 엉엉 울던 여자 아이의 떨리는 어깨를 봐도 나는 미안함 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당신은 뒤돌아선 나를 보며 미안함이라도 느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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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떨어져 있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손을 뻗어 느릿느릿 휴대폰을 꺼냈다. 그 손짓은 너무 느렸기 때문에 진동은 곧 끊겼다. 손에 휴대폰을 쥐고 생각했다. 꺼내지 말까, 그냥. 그 순간 다시 진동이 울렸다. 손끝을 타고 몸 전체를 웅웅 울렸다. 휴대폰을 가방 밖으로 빼내어 액정을 보았다. 아. 입술 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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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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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낯선 기분이 들었다. 


왜? 그가 왜 나에게? 아까 내가 먼저 떠나버려 더 퍼붓지 못한 폭언이 마음속에 남아 있나? 아니면 정신병원에 가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하러? 진동은 끊기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는 그가 나를 꽤나 오래 기다려주고 있었다. 엄지 손가락으로 통화키를 눌렀다.

00:01,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휴대폰을 그냥 들고만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은 귀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나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내가 인삿말을 건네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액정 위에 조금 더 커다랗게 자리 잡은 그 이름은 가슴 떨렸지만 그것은 설렘 뿐이 아니었고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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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전화를 받으면.

열병이,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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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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