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게른 합작 <그림자 주의보> 참여
* 좀비물
카게야마 토비오는 달렸다.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조금이라도 더 귓가에서 멀어지도록 멈추지 않고 달렸다. 낯선 길이 나와도 개의치 않았다. 살 수만 있다면 마지막에 멈춰 선 곳이 지구 반대편이라도 괜찮았다. 이 빌어먹을 행성에서 카게야마 토비오는 살아남고 싶었다. 땅을 밟고 서, 살아 숨 쉬는 것이 그 자신 혼자가 될 지라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도망치는 데 집중해.
그러나 카게야마는 알았다. 제 몸에 한계가 왔음을 알았다. 숨 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아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를 위협하는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뭉개진 다리를 직직 끌며 다가오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그래, 저 코너만 돌면 멈추자. 아무도 쫓아오지 않고 있는 것 같으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바싹 긴장해 있던 마음에 작은 안심이 다가오자 그제야 체력 소모가 확 다가온 듯, 카게야마 토비오는 살짝 휘청였다. 순간 모든 체중이 다리에 실려 이대로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카게야마는 이를 악 물고 버티어 섰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게다가 카게야마가 코너를 돌기까지에는 아주 짧은 거리만이 남아 있었지만, 갑자기 밀려 온 천근같은 피로는 카게야마가 그에 도착하는 것에 저항했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이 길의 끝에는 도대체 언제 도달할 수 있는 거냐며 카게야마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결국 카게야마는 코너를 돌았다.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존재하긴 하는지 알 수 없는 피난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던 두 다리가 멈췄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무릎을 짚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이 꼭 죽을 것만 같아, 그 다음 어떤 행동을 취할 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나온 행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급한 마음에 숨이 찼다. 오래 쉴 수 없다. 카게야마는 눈을 느리게 떴다. 눈꺼풀을 올리는 그 작고 단순한 행동조차 카게야마에게는 버거웠다. 카게야마는 주먹으로 제 무릎을 쳤다. 정신 차려, 병신아. 카게야마는 작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팍 치켜들었다. 빨리 움직, 여, 야….
"하, 하하."
카게야마는 그만 웃어 버렸다. 추욱 흘러내린 채 저를 직시하고 있는 그 눈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카게야마는 내내 외면하고 있던, 이제 온 지구를 지배해 버린 존재 법칙 한 가지를 마침내 인정하고 말았다.
이 별에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갈 곳은 없다.
정말 바보 같다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안전은, 씨발. 긴장한 채로 며칠 밤낮을 새운 터라 다 터진 입술이 찢어져 비릿한 맛이 났다.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 헛것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안전'이라는 단어는 이미 세상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은 허상에 불과했다. 살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 그것이 카게야마의 이성적인 사고 회로를 잠시 끊어 놓았던 것이다.
왜 안일하게 생각했을까. 제 뒤에만 그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미 이 행성은 저 더러운 괴물들에 뒤덮여 버렸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 카게야마는 무슨 수를 쓴다 하여도 자신은 이 괴물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무력해졌다.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그것이 눈알을 덜렁거리며 제게 다가오는 것을, 제게 손을 뻗는 것을, 저를 향해 그 눌러 붙은 입술을 쩌억 소리 나게 벌리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실 걸음이 느리고 감각 기관이 둔한 이 괴물들은, 무리를 지어 있을 때 위협적인 것이지 한 마리뿐이라면 카게야마 혼자서도 그것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적인, 혹은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너무 지쳐 버렸다.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어딘가에 안전한 장소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카게야마는 동시에 무너져 버렸다.
어차피 죽을 거면 힘 빼지 않는 게 나으려나. 카게야마는 피식 웃었다. 아프지 않게 먹어 줬으면 좋겠는데….
"카게야마!!"
갑자기 생각의 흐름을 끊어 놓은 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퍼뜩 떴다. 놀라움에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휙 돌렸으나 시야에는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있다. 살아 있다. 살아서 저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 사실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그 다급한 발소리가 너무나도 벅차 카게야마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기뻐하기 이전에 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간과했다는 것을,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그 사람은 저의 이름을 불렀고,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했고, 그 이유는,
"…히나타?"
너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카게야마!! 뒤로 물러서!!"
"히나타!! 어디 있는 거야? 어디에 있어?!"
"나는,"
그 때 바로 귓가를 스쳐 간 재빠른 발소리, 카게야마는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고 참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발소리에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괴물의 신음 소리가 섞여 들어갔고, 카게야마의 땀에 젖은 얼굴에는 가죽이 죄다 벗겨져 붉은 핏줄이 선연한 그것의 손이 닿았다. 카게야마는 그러나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카게야마의 시야에 주황빛 머리카락이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
히나타 쇼요는 각목으로 괴물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그것의 반 토막 난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의 신음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러나 히나타가 한 번 더 각목을 휘두르자 목이 뚝 떨어져 나갔다. 소리는 그쳤다. 머리가 없어진 괴물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카게야마의 얼굴을 뒤덮으려 했던 손을 히나타가 각목으로 치워냈다. 저를 걱정스레 올려다보는 동그란 눈에 카게야마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그 동안의 외로움도 아니요 단순한 기쁨에 의한 눈물이었다.
***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는 이제 둘의 것으로 늘었다. 카게야마는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지 오래였으나 웃었다. 눈물 자국 선연한 얼굴로, 울면서 힘들다고 악을 써도 모자랄 몸 상태로 웃었다. 그것은 낯간지럽게도 히나타가, 살 수 있다면 함께 살아가고 싶던 녀석이 제 옆에서 발맞추어 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으며 우는 자신에게 히나타의 밝은 목소리가 전했던 내용 탓이기도 했다.
'어, 카게야마 군 혹시 무서웠던 거야?'
'그런, 거, 아, 니거든.'
'걱정 마! 우리 살 수 있어!'
'무슨,'
그 뒤로 히나타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은 역시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카게야마가 이해한 대로 요약하자면 : 미국에서 우릴 구하러 온대!
이 작은 나라 대표는 그의 생사도 알 수 없건만 생판 남의 나라에서 구하러 온단다. 그것은 곰곰이 되짚어 보면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으나 카게야마를 비롯한 생존자들에게는 한 줄기 빛 그 이상이었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시작된 미국, 그래서인지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준비가 빨랐던 것 같다. 이 괴물로 뒤덮인 세상에서 그들에게 구조된 이후 대체 어디로 향하게 될 진 아무도 몰랐지만 일단은 그들이 온다는 이 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향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스가 선배, 라디오 갖고 있어.'
마치 제가 갖고 있던 양 어깨를 쭉 피며 자랑스레 대꾸하는 히나타에 카게야마는 더 이상 울 수 없어 결국 웃고 말았다. 엇, 지금 비웃은 거냐! 폴짝폴짝 뛰며 화난 척 언성을 높이는 히나타의 얼굴을 밀어내며 카게야마는 새로 생긴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거다.
'내가 알려 줬는데 버리고 가다니!'
'시끄러, 빨리 가자.'
'나 보고 싶었다고 운 주제에.'
'내가 언제, 이 보게가?!'
평소엔 그렇게 듣기 싫었던 한 마디가 들려오자 그제야 히나타의 얼굴에 걱정 없는 미소가 피어났더랬다. 그 얼굴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카게야마는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향해 물었다. 근데 여기가 어디지.
방향 같은 것은 확인하지 않고, 그저 괴물들이 없는 곳으로 마구 달음박질 쳤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목적지는 그닥 멀지 않았다. 많이 뛴 것 같지도 않은데 둘은 건물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카게야마는 약간 비장한 얼굴로 그 건물을 위에서부터 쭉 훑어 내렸다. 미야기 현 내 가장 높은 건물, 7층짜리 대형 상가. 이곳인가. 카게야마는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던 건물에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유리문을 밀려고 했는데,
"그나저나 골동품 수집이란 취미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안 그래, 카게야마?"
히나타는 문득 떠오른 말을 제 멋대로 뱉어 놓고는 킥킥 웃으며 카게야마가 들어서려 했던 건물을 뱅 돌아 지나갔다.
"야, 어디가! 여기잖아."
"쉬잇, 조용히 하고 이 형님을 따라와."
지가 제일 시끄러우면서. 그리고 키도 쬐끄만 게 무슨 형님. 카게야마는 투덜대면서도 고분고분 히나타를 따라갔다. 히나타는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녹색 문 앞에 서서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 그것은 이 건물의 뒷문인 것 같았다. 자.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다가오기 무섭게 그의 손에 각목을 들려주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넌 손이 없냐? 없으면 입으로 물던가, 왜 나한테 주고 지랄이야.’와 같은 예상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말없이 그것을 받아드는 것을 보고는 무언가에서 승리한 기분이 들었다.
카게야마 몰래 씩 웃어 보인 히나타는 조금 힘겹게 그 뒷문 옆에 나 있는 커다란 창문을 반쯤 열고는, 그 틈새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창문 탓에 히나타의 모습은 아주 뿌옇게 보였는데, 그마저도 금세 모습을 감추어 버려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각목을 쥐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여기로 들어오라고? 몸집이 작고 유연한 히나타는 무리 없이 통과했지만 180cm가 넘는 데다 뻣뻣하기 그지없는 카게야마는 자신이 그 창문으로 머리는 들이밀 수 있을까 고민하던 순간,
“헤이, 카게야마!”
“아, 그런 거였냐.”
“뭔 소리야. 빨리 와.”
달칵 소리와 함께 열린 뒷문 새로 얼굴을 빼꼼 내민 히나타가 카게야마에게 손짓했다. 그래, 보게도 생각은 있을 테니. 카게야마는 그제야 히나타의 행동을 납득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제게 다가온 카게야마에게서 각목을 자연스레 넘겨받은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며 문을 닫았다. 찰칵하며 문이 잠겼다.
“가자!”
“…옥상 가는 거지?”
“엉.”
“계단으로?”
“엉.”
카게야마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고 한 마디 덧붙였다. 전력이 다 끊겼는걸. 카게야마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첫 계단에 발을 디뎠다. 히나타가 그 등을 가볍게 밀어주며 뒤를 따랐다.
계단은 매우 촘촘하고 그 간격이 좁아 오르기 힘들었다. 게다가 개수도 많고 높기까지 해, 카게야마는 아직 반 층의 반 계단 정도밖에 오르지 못했는데도 힘에 부쳤다. 히나타는 점점 카게야마의 페이스가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카게야마의 등을 조금 더 세게 밀어 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히나타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카게야마가 갑자기 뛰쳐나가듯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 카게야마?! 당황한 그의 부름에 반응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카게야마의 뒤를 히나타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빨리하여 뒤따랐다.
카게야마는 이층 복도로 통하는 비상구 앞에 멈춰 섰다.
"왜 갑자기 뛰어간 거야?"
"……."
제 옆에서 헥헥거리며 묻는 히나타의 목소리를 카게야마는 못들은 척 숨만 몰아쉬다 침을 꿀꺽 삼켰다. 카게야마를 이쪽까지 끌어당긴 것은,
"어이, 카게야마."
"……."
"여기 냄새 좀… 이상하지 않아?"
그것들의 냄새였다. 시체 썩는 냄새.
카게야마는 발을 떼었다. 자신의 감각이 맞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들이지 않길 바라서, 그들이 무서워서 카게야마는 감히 확인할 용기가 났던 것이다.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여기가 위험할 순 없다고, 여기마저 너랑 같이 있는 여기마저 위험해선 안 된다고.
그러나 그 용기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건지 한 걸음 내딛은 카게야마가 머뭇거리는 찰나,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옆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튼 그 작은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채 카게야마를 향했다 다시 복도 쪽으로 돌아갔다.
이럴 리 없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히나타의 두 눈에는 괴물들이 떼 지어 몰려오는 것이 담겼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을 잡으려는 듯 손을 앞으로 쭉 뻗고 시선을 둘에게 고정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히나타는 정신을 차렸다. 하얀 물감으로 덮어 버린 듯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에 생각을 다시 채워 넣었다. 히나타는 평정심을 되찾고 복도 양 끝을 살폈다. 양 쪽에서 오고 있었다. 히나타는, 자신의 질려 버린 얼굴을 마주한 뒤 완전히 얼어 버린 카게야마의 손목을 세게 쥐고 끌어 당겼다. 카게야마는 힘없이 끌려갔다. 조금 빨리 가면 돼, 괜찮아. 이런 상황, 카게야마를 찾아다니면서 많이 맞닥뜨렸으니까. 그치? …그런데, 왜 저렇게 빨리 다가오는 거지.
히나타는 그제야 알았다. 지금까지 봤던 속도가 아니었다. 저것들이 우리 인간을 멸종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까닭은, 떼 지어 다가와 도망치려 하면 어느 순간 사방을 막고 있어 경로를 차단하였음에 있었다. 그들은 느렸다, 원래, 아주. 그런데 저것들은 뭐지?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지? 어떻게 저렇게 달릴 수 있는 거지?
히나타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에게도, 카게야마에게도, 이 둘을 기다리는 모두에게도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 구조대가 도착하기로 한 그곳에 닿는다 해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우선 피해야 했고, 구조대와 만날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 놓아야 하니까.
히나타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옥상에 가는 것만 생각하자. 그리고 히나타가 삼 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 한 쪽을 올린 순간, 어째선지 갑자기 콧속에 훅 밀려들어온 그들의 냄새에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멈추어 버렸다.
"카게야마!"
히나타가 붙잡은 손목을 당기며 그를 채근했으나 카게야마는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다급한 목소리에 실린 제 이름을 한 번 더 들었을 때서야 카게야마는 복도를 향했던 시선을 히나타에게 돌렸다. 그 행위는 몹시도 기계적이어서 목이 돌아갈 때 끼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카게야마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살 수 있다며. 그 눈에 잠깐 스친 것은 원망이었다. 히나타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카게야마의 손목을 쥔 손에 아프지 않게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카게야마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완전히 그 쪽으로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목을 당겨 앞에 보내고 자연스레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뒤를 지켜 섰다. 빈손인 그와는 달리 각목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반대의 상황이었을지라도 히나타는 그렇게 하였을 것이었다. 히나타는 각목을 세게 쥐었다. 고르지 못한 나뭇결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시끄러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온다.
나는 너를 지켜야 한다.
***
사 층,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바로 뒤에 있었다. 히나타가 각목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게야마는 앞만 보고 달렸다. 비겁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카게야마는 무서웠다. 어느 새 코앞에 다가온 그것들이 무서웠다. 발을 멈추는 순간 집어 삼켜질 현실이 무서웠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진 각목 소리가 무서웠다. 카게야마는 멈출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대신 뱃속부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히나타!! 거기 있어?!"
"나 계속 네 뒤에 있으니까, 앞만 보고 뛰어!!"
목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리는 듯 했으나 카게야마는 달라진 것 없는 목소리에 안심하여 이를 악 물고 달렸다. 히나타는, 히나타라면 조금 힘들어 뒤처져 있을 지라도 금방 저를 따라잡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조금 더 빨리.
"카게야마!"
역시. 더 열심히 발을 굴렸어도 제 날쌘 친구는 어느 순간 제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을 줄 알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확실히 커진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힘든 와중에도 슬몃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카게야마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지고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좋아해!!"
그 표정은 이내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바뀌었다. 그걸 지금 말해서 어쩌잔 거야?! 평소처럼 버럭버럭 소리치는 목소리에, 가쁜 숨소리 사이로 히나타의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조금 더 크게 히나타는 소리쳤다. 넌 어때!!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히나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자신이 히나타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둘 다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존심 세우느라 먼저 다가올 때까지 버티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히나타가 다가왔다. 그러나 카게야마에게 그것은 마지막으로 마음을 터놓고 싶어하는 마음을 듣고 싶어하는, 끝자락에서 무언가 포기해 버린 모습인 것만 같아 그가 원하는 대답을 카게야마는 내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숨을 흡 들이 마시고 건물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을 때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도 않았는데 네가 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뭐랄까.
"그런 거 물어볼 시간에!!"
좋다.
"뛰어!!"
말하고 싶어.
"일단 살아!!"
좋아한다고.
"그럼 그 때 대답해 줄게!!"
그러니까,
"…그래!"
살아줘.
그리고, 칠 층.
***
다 왔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두꺼운 옥상 철문에 몸을 부딪치니 그것은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돌아보았다. 히나타는 그의 바로 뒤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좋아하는 티 같은 거 내고 싶지 않아 투덜대기만 했던 카게야마도 전에 없이 환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을 듯 다가오던 히나타의 손은 그를 지나쳐가 갑자기 카게야마의 어깨를 확 밀었다.
철문과 함께 밀려난 카게야마는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엉덩이를 부딪혔다. 놀라서 아무 말 못하는 카게야마를 향해 히나타가 여전히 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 물렸어."
저를 밀친 팔은 먼지투성이일 뿐 멀쩡했다. 그리고 다른 팔. 카게야마는 보았다. 물어뜯긴 잇자국이 선명하고 벌써 짓무르기 시작한 그의 팔. 카게야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히나타!! 거기 있어?!'
'나 계속 네 뒤에 있으니까, 앞만 보고 뛰어!!'
그 때였나. 그 목소리가 먼 것 같이 느껴졌을 때, 그 때였나.
순간 다시 역한 냄새가 풍겼다. 히나타에게 가야 한다. 히나타를 데려와야 한다. 물린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되잖아. 나중에 치료하면 되잖아. 카게야마는 땅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카게야마의 다리에 들어갔던 힘이 빠진 그 순간, 카게야마도 히나타도 알았다. 카게야마는 일어설 수 없다. 그래도 그는 마구 발버둥 쳤다. 한 손은 히나타에게 뻗고 빨리 들어와 빨리 손잡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히나타는 조금 슬픈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금방이라도 눈물을 투둑 떨어뜨릴 것 같았다. 왜냐하면 히나타의 얼굴이, 그 표정이
"카게야마, 좋아해."
"대답 듣고 싶으면 이리 와!! 이리 와서, 같이 살아!!"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아서.
히나타는 내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주는 상처를 애써 무시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고 웃으려 노력하는 입술은 울고 있었기에, 그것이 카게야마에게 너무 분명히 보였기에, 카게야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왜!! 히나타는 대답 없이 웃으며 우는 얼굴로, 멀쩡한 쪽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듯 흔들어 보였다. 아냐, 하지 마! 카게야마는 그것이 마지막을, 이별을 고하는 것 같아 고개를 마구 저었다.
"울지 마, 카게야마 군. 멋진 어른이 되어야지."
"무슨 소용이야, 그게 다!"
히나타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대답하지 않았다기 보단,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말 대신 신음이 나갈 것 같다. 히나타는 카게야마 몰래 이를 악 물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가 공포에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안 돼. 히나타를 데려 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카게야마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다리를 뻗어 문이 닫히지 않게 버티는 것뿐이었다.
"히나타, 히나타!"
"응, 카게야마."
"와, 오고 있어. 그것들이 오고 있다고!!"
"있잖아, 토비오."
쇼요!! 쇼요, 제발!! 히나타는 슬며시 웃었다. 그것은 정말로 웃음이었다. 울지 않기 위해 카게야마를 위해 지었던 가짜 웃음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혼자서만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인 그 이름으로 처음 그를 부른 순간 곧바로 뒤따라온 그의 목소리에 담긴 제 이름이 이리도 눈물겨울 줄이야. 이 작은 한 마디가 이렇게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줄 알았더라면. 겨우 이름 부르는 것뿐인데, 뭐가 그리 무서워서 부르지 못했던 걸까.
카게야마의 시야에 그것들이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울음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서워. 무서워, 쇼요. 나 무서워. 네가 죽을까봐 무서워. 카게야마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히나타는 여전히 입술에 미소를 띠운 채 양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언젠가 한 번 산에 함께 올라갔을 때, 저보다 한두 걸음 먼저 산 정상에 도착해 바람을 만끽하던 모습이었고 얼굴이었다. 지금 상황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그것은 마치, 달려와 안기라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순간 카게야마의 어깨를 뒤에서 누군가 확 끌어 당겼다. 위태롭게 문을 지탱하던 발이 질질 끌려가며 그 기능을 더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히나타는 뒤로 몸을 젖혔다. 바로 뒤에서 등을 움키는 괴물들의 위로 그 작은 몸이 스러졌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달려들어 게걸스레 입을 들이미는 괴물들 사이로 파묻혀 가면서도 히나타의 두 눈은 오롯이 카게야마만을 향해 있어서, 카게야마는 그 절망 섞인 눈동자를 히나타에게서 뗄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좁아져 가는 문 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턱 막힌 목구멍 새로 목소리를 끄집어내려 애쓰다 카게야마는, 그것들의 냄새만 희미하게 흘러 들어올 만큼 문이 닫혀갈 때 울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그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이름을 불렀다.
"히나타아아아!!!!"
안녕, 카게야마.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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