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퍼스물
“민석아, 예쁜 내 민석아.”
“내가 왜 네 민석이야, 새끼야.”
“내가 네 새끼니까 너는 내 민석이지.”
저런 말을 할 거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이라도 하던가, 표정은 있는 대로 굳히고 어린 애 같은 말이나 뱉고 앉아 있지. 그런 모습에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 민석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숨겼다. 입 꼬리 하나 잘못 씰룩이면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뭐라고, 내가 그랬다고, 자살할까, 하면서 목 매달기 좋은 나무를 찾아 루한은 긴 긴 여정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멋대로에 구제불능. 저와 하나도 맞지 않는 멍청한 남자를 옆구리에 달고 다닌 지 세 달 째 되는 오후의 민석이었다.
너는 내 운명
루한은 침이 마르고 입술이 닳도록 말해왔다. 민석아, 너는 내 운명이야. 너는 내 거야. 아무에게도 줄 수 없어. 심지어는 첫 만남에 뱉어낸 말도 저것이었다. 당황해 자리를 벗어나기도 하고, 무슨 말이냐고 바락바락 대들어도 봤지만 무엇도 먹히지 않았지. 아무리 피해도 숨만 돌리면 옆에 있다. 그러한 두 달을 보내고 나니 민석은 마침내 루한의 존재를 체념하였으며 사랑이 담긴(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공포스럽지만) 말이 귀에 파고 들면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릴 줄 알게 되었다. 그러한 민석의 한 달이 더 흘렀다. 삼 개월을 무서운 애정 공세에 시달리다 보니 민석은 이제 그 말들이 진실 그리고 진심인 것은 아닌지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민석아, 밥은 조금도 남겨선 안 돼. 많이 먹고 건강해지자. 네가 아프면 내가 아파.”
“더러워.”
“너는 내 운명이잖아. 너는 내 일부야. 네가 아프면 내 일부가 아픈 거니까,”
“알겠으니까 설명하지 마, 미친놈아.”
욕을 먹어도 어깨를 으쓱하기만 할 뿐. 너는 난데, 나한테 내가 욕을 좀 먹을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무릎을 더 붙여온다. 예쁘고 곱게 생겨서,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순진해 빠진 아기 사슴의 탈을 뒤집어쓰고 그래서는 안 되지. 이건 반칙이야. ‘안 돼요, 싫어요.’ 한 마디면 모두가 미안하다고 사과해올 줄 아는 여린 아가씨가 아니라 ‘안 돼요, 싫어요.’ 수천 번을 반복해도 그렇구나 하하 민석이는 반항도 깜찍하게 하네 따위의 말과 함께 얼굴을 주물거리는 변태 아저씨에 불과했던 것이다.
민석이 이 변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강이 7시간 있던 날, 왜인지 루한과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아 오늘은 모든 강의가 휴강을 했어 되도 않는 거짓말을 치다가 같은 수업이 3개임을 알고 울면서 밥을 두 그릇 먹은 과거. 고독을 즐기고 싶어 미안 루한 나 오늘 약속이 있어 그럴 듯한 거짓말을 치다가 미행을 한 루한이 민석을 왕따로 오인해 민석의 과를 뒤집어 놓으려고 했던 과거. 이 말고도 몇 번의 실패를 거치고 자신이 루한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청승맞게 눈물이나 흘려댄 밤도 있었다. 조금 덜 멍청하게 구는 게 어때, 하고 민석의 상냥한 친구 준면이 조심스레 말해온 적도 있지만 민석은 루한이 심각하게 영악한 것이라 주장하며 준면의 입에 삼각 김밥을 쑤셔 넣었다. 민석의 침이 잔뜩 묻은 삼각 김밥을 문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민석을 원망스레 쳐다보던 준면은 세훈의 손길로 자유를 되찾았다. 세훈아, 돈이 없어서 그 더러운 걸 처먹는 거라면 내가 하나 사 줄까. 옘병할 김준면. 뒷말은 민석이 했는지 세훈이 했는지 아니면 동시에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민석아, 그런데 오늘은 왜 집에 같이 갈 수 없는 거야?”
“그 민석아 타령 좀.”
“응, 민석아?”
“……나 미팅 나갈 거야.”
쨍그랑. 루한의 손에 꼭 쥐여져 있던 녹슨 숟가락이 바닥과 부딪는 소리가 민석의 귀에 제대로 박혀 들어왔지만 민석은 모르는 척 콩을 젓가락으로 쑤셔대었다. 아이, 참. 왜 이렇게 안 집히는 거야. 중얼거리며 콩밭을 휘휘 젓는 젓가락 끝이 조금 떨리는 것도 같다.
그래, 민석은 커다란 일탈을 시도했다. 준면과 대화만 해도 민석아 민석아 나 보여 나 봐줘 나랑 얘기해줘 네 목소리를 듣는 건 좋지만 이렇게 날 방치하면 내가 슬퍼 안 슬퍼 칭얼거리며 주변을 뱅뱅 맴돌아 준면이 난처한 얼굴로 이것을 치우지 않으면 나는 너와 친구를 하지 않을 테야 가자 세훈아 하고 조심스럽게 돌아서게 만드는 루한이니, 미팅에 나간다고 하면 큰 타격을 받겠지. 그나저나 그 때 옆에 오세훈이 있었구나, 존재감이 도경수와도 비슷한 존재야. 어쨌든 여자와 짝짓기, 음, 좀 남사스럽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니까, 짝짓기를 하면 실망해서 다시는 곁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실망하지? 물론 그럴 것 같긴 하지만. 아니, 그러겠지만. 민석은 콩을 콕콕 찔러대며 생각을 멈추었다. 루한이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왜…, 야. 이 미친.”
“민석아.”
커다랗고 촉촉한 두 눈이 넘쳐 버린 호수마냥 물을 질질 뱉어내고 있었다. 숟가락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눈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정말 소리 소문 없이 예쁘게 우는 구나. 민석은 멍하니 루한의 젖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마음을 굳게 먹자. 이렇게 넘어간 게 한두 번이니. 이번은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 매몰차게 굴어서라도 루한을 떼어 놓겠어. 저렇게 우는 것을 보아 하니 민석에게 고운 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민석은 루한의 말을 재수 없게 받아쳐 루한이 화가 나 어쩔 줄 모르도록 만들면 된다. 편안한 캠퍼스 라이프를 위해! 김민석 너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다짐을 하자마자 민석은 루한에게 손을 잡혔다. 덥석 잡아챈 손 위에 입술을 부비며 루한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것이 바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인가. 퐁퐁, 이라는 귀엽고 만화 같은 수식어가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민석아, 민석아.”
“왜, 왜 그래. 네가 그래도 난 미팅 나가. 나갈 거야.”
“우리 민석이, 이렇게 예뻐서 어쩌지. 미팅 나온 바보들이 민석이한테 다 반해 버리면 어쩌지. 나는 민석이밖에 없는데 민석이한테 여자 친구가 생기면 어쩌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은 비난이 아니라 고백에 가까운 것이었다. 민석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뒤로 뺐다. 점점 다가오는 루한의 얼굴이 부담스럽고 괜히 죄책감을 심어 주었으니 말이다. 한 마디 먹여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 버렸다. 루한이 말을 끝맺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석아, 민석아. 네가 이렇게 예쁜데 내가 안심을 하고 있을 수가 없잖아. 미팅 그런 거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니?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나는 민석아. 자꾸만 걱정이 돼. 너는 내 운명이니 다른 사람을 보지 않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네게 달라붙으면 어쩌니, 민석아. 민석아, 민석아. 민석아! 민석은 루한의 손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의자를 요란스레 뒤로 끌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딱딱한 의자에 아프게 짓눌려 있던 엉덩이를 툭툭 털고 민석은 루한을 노려보았다. 째진 눈을, 마냥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로 루한은 눈물을 잔뜩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그 예쁜 눈을 노려보던 민석이 냅다 소리쳤다.
“안 나가, 씨발아!”
“민석아?”
“쓰레기! 멍청이! 바보! 해삼!”
점점 욕의 수준이 하찮아지지 않니, 하고 머릿속을 스치는 말을 루한은 낼름 삼키고 눈물도 함께 꿀꺽. 환히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민석은 무시하고 식판을 놔둔 채로 식당을 벗어났다. 루한은 마주한 채 놓인 식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테이블을 뛰어 넘어 민석을 졸졸 따랐다. 민석아, 그럼 오늘 나랑 같이 집 가? 몰라! 같이 집 가? 알아서 해, 멍청한 새끼야… 식판은 치웠어? 아니, 민석이 따라 왔는데. 씨발! 민석은 자리로 돌아가며 가오 다 죽는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루한과 제 식판을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위태롭게 식당을 가로질렀다. 헤실거리는 얼굴로 같이 가 민석아 내가 들까 옆에서 귀찮게 굴던 루한은, 민석과 살짝 스쳐 식판 하나를 떨어뜨리게 한 여학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그녀의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발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감싸 쥐고 루한은 억울함에 뒤덮인 얼굴로, 억울함에 물든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난 잘못 없어. 네 친구가 내 운명을 아프게 했다고.”
“네 운명?”
“저기, 있잖아.”
“민석아, 내 운명.”
“얘가 네 운명이냐?”
“쟤 입 못 열 정도로만 갈겨줘.”
민석아아! 처절한 부름이 고막까지 닿지 않도록 민석은 단단히 귀를 막았다. 멍청한 운명론자 덕분에 민석의 캠퍼스 라이프는 도통 조용해질 줄 모르지. 어쩌면 조용해진 순간 저도 모르게 루한의 손을 덥석 잡아버릴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민석은 기도했다. 눈에 띄지 않는 학교생활을, 이왕이면 저 사슴의 눈에 띄지 않는 학교생활을 내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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