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개성 학원물
* 토도바쿠 합작
0.
2학년 3반에는 알 수 없는 녀석이 있다. 이상하게 머리 한 쪽은 붉고 다른 쪽은 하얘서 입학 초 선도부에게 자주 불려가 안 좋은 인상을 남겼지만, 머리색은 자연인데다 수업 시간에 충실히 임하며 성적도 중상위 급이라 선생님들이 눈여겨보는 모범생. 생긴 것도 상당히 준수.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여자를 후리고 다닌다는 자칭타칭 웅영고 최고 미남 모노마 네이토 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뒤에서 칭송 받는다 : 물론 그는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러나 애인을 사귀어 본 적은 단 한 순간도, 다들 연애의 꽃을 피운다는 유치원 시절조차도 그 어떤 아이와 설레는 마음으로 손을 잡아본다거나 한 적 없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쉬는 시간 종만 쳤다 하면 그의 서랍에서 쏟아져 나오는 만화책.
그가 만화를 본다고 뭐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타쿠 녀석들은 많다. 2D에 환장하면서도 애인 자주 갈아치우는 녀석도 있다. 저기도 지금, 무리지어서 어제 누구쨩이 어쨌고 누구쨩이 저쨌고 수다 삼매경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달라.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진지하게 만화책만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휴대폰일 때도 있다, 애니가 재생되고 있는. 즐거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그런 얼굴밖에 할 수 없는지 나른하고 지루한 표정.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 반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없다. 2학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아마 전교생 중 그것을 들어본 자는 손에 꼽을 것. 그는 그 누구와도 상종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하나 더 특이한 점은,
"안녕, 쇼토."
"……."
"헤, 오늘도 잘생겼네!"
웅영고 2학년 일진짱 바쿠고 카츠키가 반 년 넘게 공 들이고 있는 중.
1.
바쿠고 카츠키는 얼빠다. 답 없는 얼빠다. 그 사실은 아주 유명하다. 왜냐하면 바쿠고가 일진짱이기 때문이다.ㅡ싸움질을 가아끔 할 때도 있지만 그냥 공부 안 하고 패거리 우루루 몰고 다니는, 잘생겨서 유명하지만 평범한 남고생이다. 하도 말이 험해서 친구들이 장난 식으로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그게 거의 공식처럼 굳어졌다. 어쨌든 그가 얼빠라는 사실은 전교뿐만 아니라 옆 학교에도 퍼진 사실이기 때문에 웬만큼 생겼다는 녀석들은 바쿠고에게 한 번씩은 꼭 찝쩍거리기 일쑤다. 물론 대부분이 바쿠고 옆에 꼭 붙어 다니는 멍청이들보다 덜 생겨서 탈락이지만. 모노마 네이토도 그에게 추파를 던진 적 있었다.
'안녕. 네가 바쿠고?'
'엉.'
'너 잘생긴 거 무지 좋아한다며. 나 어때?'
'싼티나서 싫어.'
그리고 장렬하게 까였다.
바쿠고는 얼빠지만 그 기준은 아주 높았다. 그래서 대시해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전부 찼다. 그의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네가 쟤보다 잘생긴' 혹은 '예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냐?'하며 혀를 찼다. 바쿠고는 그들의 정강이를 찼다. 그렇지만 언제나, 어느 순간 보면 저번에 찼던 사람보다 잘난 녀석들이 바쿠고가 좋다고 허덕이고 있어 그들은 회의감에 빠졌다. 저렇게 성격 나쁘고 머리 삐죽거리는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래, 바쿠고는 이상하게 인기가 많았다.
바쿠고 카츠키가 누구를 사귈까, 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아니, 뜨거운 감자'였'다.
'헉, 쟤 뭐냐.'
바쿠고가
'미친 씨발이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토도로키 쇼토한테
'잘생겼잖아!!!!'
반할 때까지.
고등학교 2학년 첫날, 뒷문에 멈춰 선 바쿠고가 대뜸 한 말이다.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들은 '이 녀석 드디어 사랑을 찾았구나!' 바쿠고의 등짝을 마구 때리며 저들이 더 호들갑을 떨더니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기웃거렸지만 바쿠고가 비켜주질 않아 뒤에서 궁금함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바쿠고는 잠시 그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저를 퍽퍽 치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더니 후닥닥 그 '잘생긴' 남학생에게 달려갔다.
'야, 아, 아, 안녕!!'
'…….'
'나, 나, 나, 바쿠고 카, 카츠키인데!!'
'…….'
'카카츠키가 아, 아니고 카츠키야!!'
널 좋아해!!!!!
우렁찬 목소리에 순간 교실은 정적, 만화책에 박혀 있던 '잘생긴' 남학생 그러니까 토도로키 쇼토의 시선이 그제서야 바쿠고에게로, 그러자 바쿠고의 표정은 활짝. 바쿠고야 워낙 무대포니까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그 대상이 지나치게 잘생겼지만 지나치게 이상한 웅영고 공식 히키코모리 오타쿠라는 사실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거다.
'야, 바쿠고. 저번에 니가 오덕은 죄악…'
'그런 식으로 말하는 니가 죄악이다.'
'아니 내가 아니라,'
'꺼져.'
친구가 혹시 머리가 반반인 녀석의 소문을 듣지 못했거나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게 전문서적이라고 알고 있다거나 할까봐 다가가 그의 귓가에, 그의 과거 발언을 속삭여주던 키리시마 에이지로는 대차게 욕을 먹고 울먹이며 물러났다. 그 때부터였다. 현재, 2학기에 접어들어선 순간까지 이어지는 바쿠고 카츠키의 토도로키 쇼토 공략!
가엾게도, 지금까지 철벽에 부딪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
"바쿠고오오."
"왜 찡찡이야."
"나 어떡할까. 응? 어떡하지."
바쿠고 카츠키는 현재 매우 심기 불편한 상태.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달려와, 저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어떡해 어떡해 징징거리며 흔들어대는 제 친구 녀석 때문이었다. 너 때문에 쇼토한테 갈 수가 없잖아! 쇼토 배고프면 어쩔 거야! 몇 개월간의 덕질 끝에 토도로키의 생활 패턴을 꿰고 있는 바쿠고의 가방 속에는 아침을 자주 거르는 토도로키를 위한 크림빵이 잠들어 있었다.
"그거 때문이야, 또? 어?"
"또라니, 또라니이. 난 엄청 심각하단 말야, 바쿠고오오."
"또는 맞잖아."
"…그렇지."
허어엉, 우는 소리를 내며 키리시마가 바쿠고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려 시선을 차단한 덕분에 바쿠고는 토도로키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바쿠고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가, 그래도 친구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잔뜩 시달리고 있음을 가엾이 여겨 짜증난 티는 내지 않기로 했다.
원래 별 거 아닌 데 정신이 팔려 자주 끙끙대는 녀석이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공부를 꽤 하는 녀석은 지금 시험 기간과 겹친 연극 오디션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로 인해 착한 외동아들은 열심히 공부는 하지만 사실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오디션 준비를 하자니 내신을 챙길 자신이 없고, 내신을 챙기자니 너무 하고 싶고. 뽑힌다는 확신만 있다면 반드시 했을 거라고, 키리시마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말했다.
키리시마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바쿠고의 목에 뺨을 부볐다.
"할까? 말까…. 마는 게 좋겠지? 응?"
"야."
"으응?"
"해보면 되잖아? 확신이 필요하냐고. 그냥 해 보고 싶으니까 해 보는 거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는 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 아니냐고. 엉? 바쿠고는 그리고 입을 딱 다물었다. 단지 이 녀석에게 한 마디 해 줘야 쉬는 시간 전에 떨어지겠다 싶어서 생각대로 지껄인 거였는데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정말 멋졌어, 바쿠고 카츠키! 바쿠고는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이거, 쇼토도 들었을까? 나 이 만큼이나 멋져! 몸을 틀어 토도로키가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지ㅡ아마 무표정으로 만화책을 보고 있겠지만ㅡ 궁금했지만 저를 끌어안고 멈춰버린 키리시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쿠고오오오…."
"이제 좀 꺼져라!"
"넌 정말 멋진 놈이야! 남자답다 바쿠고!!"
키리시마는 바쿠고를 휙 돌려 저와 마주보게 하더니 감격한 얼굴로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바쿠고는 해탈한 표정으로, 뽀뽀할 기세로 가까워지는 키리시마의 얼굴을 밀어내며 토도로키를 바라봤다. 이제 잘생긴 쇼토를 볼 수 있어, 하고 들떴던 마음은 저를 빤히 보고 있는 토도로키에 의해 쿵 떨어졌다.
"바쿠고, 이쁜 것!"
"왜, 왜, 왜."
"응? 응, 예쁘니까! 어구, 예쁜 것!"
"아니, 너 말고…."
왜, 왜 쳐다봐! 왜 다가와! 오지마! 잠깐만! 심, 심장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한 발 한 발 다가올 때마다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었다. 숨이 막혔다. 그나저나 나한테 오고 있는 거 맞지, 하는 생각은 어느새 저로부터 두 발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선 토도로키 덕분에 떠오르자마자 사악 지워졌다.
"그래."
"이쁜… 헉."
"헉."
처음이다. 처음. 그토록 토도로키를 따라다녔던 바쿠고도, 그를 따라 덩달아 토도로키 옆에서 얼쩡거렸던 키리시마도, 초등학교 때부터 토도로키를 봐왔던 학생 1도 처음으로 토도로키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쿠고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쿠고에게 토도로키는 여태껏 끄덕임 정도만 허락했던 것이었다. 눈가가, 마음이, 머리가 찡 하고 띵 했다. 우리 쇼토 목소리도 너무 잘생겼어. 바쿠고가 입술을 달달 떨며, 역시 놀라서 멈춰선 키리시마를 떼어내고 토도로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제 말을 못 들었다 판단하여 반복했다.
"그래."
"으, 응?"
"사귀자며. 그래."
순간 학기 첫 날 바쿠고의 고백 그 순간보다 더한 정적이 찾아왔다. 하루에 한 번 쇼토한테 사귀자고 말하기, 그 하찮은 계획의 성실한 실천이 몇 달 만에 빛을 발했다. 그 누구도 숨조차 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바쿠고 카츠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ㅡ그리고, 토도로키 쇼토의 책상 위 휴대폰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토죠 노조미 양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러브라이브 1기 노조미 대사 : 해 보면 되잖아? 딱히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 해 보고 싶으니까 해 보는 거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란 건, 대부분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 아냐?
2.
바쿠고 카츠키는 토도로키 쇼토를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그의 친구들도,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급우들도, 심지어는 다른 학년이나 다른 학교 학생들도 안다. 토도로키도 안다… 아마? 본인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인 바쿠고를 보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겠지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바쿠고가 좋아하고 있는 대상에, 본인은 떨어져 있다는 듯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는 느낌.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아니다. 사귀자고 해놓고 그 미적지근하고 평소와 달라진 것 없는 거리감에 바쿠고는 속이 탔다.
"안녕, 쇼토."
"응."
그 이후로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는 게 무지 기쁘지만 말야. 바쿠고는 저도 모르는 새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고 토도로키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사귀기 전에도 등교는 함께 했지만ㅡ바쿠고가 토도로키 집 앞에서 기다렸다. 스토커가 아니다, 사랑의 열정일 뿐ㅡ 정식으로 연인이 되고 나서 하는 첫 등교는 지나치게 가슴 떨렸다.
만나고서 몇 발 떼지 않았을 때, 바쿠고는 제 눈 바로 앞에서 살랑이고 있는 토도로키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됐다. 바쿠고의 눈이 잔뜩 커져 있었다.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바쿠고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제 뺨을 쭈욱 잡아당겼다. 힘 조절에 실패해 눈물이 찔끔 났다. 하지만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미친놈아, 사귄지 이틀째다.
바쿠고는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시선은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바쿠고는 이번엔 조금 다른 떨림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손. 쇼토 손. 곱고, 단단해 보이는 손. 토도로키에게도 직접 여러 번 말했지만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손을 아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냐만, 특히 손은 볼 때마다 잡고 싶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했던. 이제는 사귀는 사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바쿠고는 바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토도로키의 손등에 닿기 직전, 바쿠고는 황급히 손을 거뒀다. 얼굴이 마치, 토도로키의 한 쪽 머리색처럼 붉었다.
무, 물어봐야 되나. 바쿠고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눈을 계속 깜빡였다. 오반가, 그거. 괴롭히던 입술을 놓아주더니 바쿠고는 입 안에서 혀를 꾹꾹 씹었다. 물어보자니 한심해 보일 것 같고, 그러지 않자니 토도로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다. 바쿠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펴기만 반복했다. 토도로키는 그런 바쿠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앞만 보고 정직하게 걷기만 하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바쿠고도 멈췄다. 여전히 새빨간 얼굴이 의아한 표정으로 토도로키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뒤통수도 잘생겼네. 잠시 멈춰서 아무 움직임 없던 토도로키가, 바쿠고가 왜 그러냐 물어보려 할 때 대뜸 말을 꺼냈다.
"옆으로 와."
"어, 어? 응, 응, 응."
"사귀잖아. 옆에서 걸어."
쇼토가 말 걸어줬다. 그 날의 역사적인 그래, 이후로 처음. 게다가 옆으로 오래! 바쿠고는 터질 것처럼 쿵쿵쿵쿵 뛰는 심장께를 살짝 부여잡았다가, 소녀처럼 발그레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ㅡ그의 친구들이 봤으면 기함을 했을ㅡ 그의 옆으로 도도도도 뛰어갔다. 그래, 손 같은 거 내일 잡아도 되니까!
***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바쿠고는 심각했다. 제가 건넨 크림빵을 반 정도 맛있게 먹고 있는 토도로키를 보는 눈빛은 진지했다. 한 달 동안 손도 못 잡다니, 말도 안 돼. 저는 수줍어 망설이느라 그랬다 치지만, 토도로키는 아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만화책을 넘기는 손으로, 휴대폰을 터치하는 손으로 나를 좀. 바쿠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쇼토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손잡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근데 넌 아니니. 바쿠고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토도로키가 시시각각 변하는 바쿠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우물거리더니 크림빵을 봉지에 도로 넣어 그 쪽으로 밀었다.
"…왜? 맛없어?"
"너 먹어."
"으응. 이제 다른 거 사올까?"
"아니. 같이 먹어."
바쿠고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안해졌다. 그리고,
"있잖아."
"응?"
"내일 너희 집 갈래."
기절했다.
***
기뻐해야 해, 말아야 해. 바쿠고는 잠시 오만상을 찌푸렸다가 토도로키가 볼까봐 표정을 삭 바꾸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토도로키는 시선을 TV 화면에 박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잔뜩 집중한 모양이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 몰래 한숨을 쉬었다. 사귀고 나서 한숨이 는 것 같다.
물론 토도로키와 홈 데이트를 하게 된 건 기쁘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애니를 보고 있을 줄은 몰랐지…. 네 취미를 함께 하는 건 기뻐, 하지만 적어도 손은 잡고 시작하지 그랬니. 혈기왕성한 남고생 둘이, 그것도 사귀는 중인 남고생 둘이 아무도 없는 집에 함께 있는데 벌어지는 일이라곤
'와, 와, 왔어?'
'TV 어딨어?'
'응? 저기.'
'…뭐해?'
'TV, 진짜 좋네.'
'응?'
'전에 말했잖아, 네가.'
'그, 그거 기억해준 거야?'
'응.'
'근데, 진짜 뭐해?'
'소파 가서 앉아.'
'으응.'
…
「切なさには名前をつけようか Snow halation~」
바쿠고는 노래에 맞춰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TV 새로 샀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준 건 정말 기뻐. 하지만 그 기억을 지금 이용할 필요는 없잖아?! 애인 집에 오자마자, 처음이면서 당당하게 USB를 연결해서 애니메이션 보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만 집중한 옆얼굴이 너무 잘나서 바쿠고는 그것을 흘끗흘끗 훔쳐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정확히 두 번째 편이 시작된 지 7분 뒤, 토도로키를 훔쳐보기만 하던 바쿠고는
하고 싶어.
충동과 욕망에 휩싸였다.
제 1단계, 자괴감에 빠진다.
미쳤어, 미쳤어. 사귄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혼자 쳐다보고 있다가 뭐하는 거야. 변태도 아니고, 뭐야. 건너뛰어도 너무 건너뛰었잖아, 응!? 물론 애인이랑 그렇고 그런 게 하고 싶은 거, 정상이지만 우리는 아직 아니라고!! 정신 차려, 카츠키. 이건 아니야. 아니란 말이다. 아니라고. 아니, 아니ㅡ 아닌, 가?
제 2단계, 인정한다.
그래, 좋아. 난 변태다.
제 3단계, 합리화에 들어간다.
그치만… 다시 잘 생각해봐. 한 달이면 꽤나 긴 시간이야. 그리고 우린 혈기왕성한 18세, 절대 이상한 게 아니지. 그럼, 그럼. 우리가 아닌 게 어디 있어? 아직 손도 못 잡았으면 어때, 오늘 전부 끝내면 되지.
어, 전부?
이거… 좀 괜찮은데. A부터 Z까지.
그리하여 제 4단계,
“저… 쇼토.”
“…….”
“우리, 할까.”
말했어! 바쿠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토도로키의 얼굴을 보기 두려웠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을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열이 잔뜩 몰렸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다시 주먹을 쥐니 땀이 차 아무 소용이 없게 됐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다. 바쿠고의 정신세계는 다시 제 1단계로 돌아갔다.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아직 뽀뽀도 안 했는데 하긴 뭘 해!! 아마 화 낼 거야. 싫어할 거야.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까도 그랬지만, 바쿠고는 토도로키가 제 감정을 표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잊고 그런 걱정에 빠졌다. 토도로키는 용케도 노랫소리 사이로 바쿠고의 작고 소심한 목소리를 듣고는ㅡ본인은 강인하고 단호하게 말한 줄 알지만ㅡ 고개를 슬쩍 돌려 멀뚱히, 점점 빨개지는 바쿠고의 얼굴을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평소처럼 무심하고 덤덤한 말투였다.
"저거 입어주면."
"…으응?"
토도로키의 검지 손가락은 TV 화면을 향해 있었다. 얼빠진 얼굴로 솜이 보송보송한 무대의상을 빤히 쳐다보던 바쿠고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나, 나 저거 어, 없, 는데. 더듬더듬 멍청해 보일 것 같아 말도 못 한다며 스스로를 바쿠고는 마음속으로 마구 타박했지만 토도로키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있어."
"으, 응?"
"잠깐만."
그리고 토도로키는 집을 나섰다. 바쿠고는 벙쪘다. 말릴 새도 없이 아아, 그는 떠났습니다. 몇 초를 그렇게 멍해 있던 바쿠고가 팔을 뻗었다. 파들거리는 손이 소파 옆 서랍장을 열고 주섬주섬 에어컨 리모콘을 꺼내들었다.
삑. 에어컨이 켜졌다. 에어컨을 틀기에는 조금 무리인 날씨, 그렇지만 바쿠고는 솜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2분 37초 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바쿠고의 마음과 달리 정갈하고 깨끗한 소리였다.
***
"이거면 됐어?"
"응."
"……."
"너, 꽤 괜찮네."
바쿠고의 얼굴이 화악, 삽시간에 붉어졌다. 조금은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식었던 얼굴이 다시 불타올랐다. 여자애도, 여리여리한 편도 아닌 제가 이 옷을 입어서 정이 후두둑 떨어졌으면 어쩌나 했는데. 뺨을 찬 공기가 스쳤다. 바쿠고가 입술을 살짝 잘근거리고는 토도로키에게 다가가 그 옆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치마를 입으니 행동이 절로 조신해지는 모양이었다.
"그, 그럼 이제 하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가 결국 삐끗했다. 바쿠고는 이를 앙 다물었다. 쪽팔려. 물론 토도로키는 관심 없는 얼굴. 토도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쿠고는 손을 뻗어, 뛰느라 땀에 젖었던 이마를 쓸었다. 에어컨 바람에 전부 말라 있었다. 바쿠고의 입술 새로 얇은 숨이 새어 나왔다. 잔뜩 긴장한 숨.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대고 살짝 눌러 몸을 지탱해서 조금 더 가까이 옮겨 앉았다.
가슴팍에서 대롱이는 방울 두 개를 잠시 잡았다 놓아 멈추게 한 후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토도로키는 멀뚱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 할게."
"응."
바쿠고의 입술이 천천히 토도로키의 입술에 다가갔다. 닿았다.
손가락도, 입술도 전부 덜덜 떨고 있었다. 바쿠고가 눈을 질끈 감고 토도로키의 입술에 제 것을 문댔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바쿠고를 내려다보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3.
헤어질까.
아니, 아니. 쇼토가 싫어졌다는 게 아냐. 그치만 그 때, 그 옷 입고 섹스를 할 순 없다고 정색하는 바람에 키스, 까지 밖에 못 했고… 물론 쇼토랑 하는 키스는 황홀했다. 나 정말 흥분했고, 쇼토도 그런 줄 알았는데. 키스까지만 한 게 문제라는 게 아니다. 키스라도 한 게 어디야. 솔직히 말하면 속상한 거다. 섹스를 안 하는 이유가 그 옷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게, 어차피 옷은 벗으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그럼 저거 마저 봐야 해.' 고개를 돌려버렸다는 게 속상한 거다.
나, 정말 헤어질까.
"아냐!!"
"악! 어우, 깜짝이야."
"미쳤어?"
"아냐, 씨바아아아알."
쟤 오늘 왜 저래. 미쳤나봐. 죽을 때가 됐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친구들은 테이블에 푹 엎어진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쓸고, 어깨를 톡톡 치고, 손을 주물 거렸다. 만지지 마라 새끼들아, 쇼토 거야. 힘없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카미나리가 혀를 쯧쯧 찼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해선, 그의 집 근처 카페로 셋 모두를 불러내더니 아무 말도 안하고 끙끙거리기만 한다.
'혹시 토도로키 때문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키리시마가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바쿠고의 얼굴을 보고 카미나리와 세로가 몸을 던져 그의 입을 막았다. 바쿠고는 그 꼴을 보고 한숨만 쉬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심각성을 인식했다. 바쿠고가 욕도 안 하고, 때리지도 않아. 그 때부터 눈치만 보고 있는 거다, 삼십분 째.
“야.”
“응?”
“니들 가라.”
“그래도 돼?”
후닥닥 뛰어 나왔더니 한참 기다리게 하고, 다 기다렸더니 아무 설명 없이 보내려는 것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이런 바쿠고는 처음이라 그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빨리 가, 좀. 바쿠고의 목소리가 짜증을 담고 있었지만 울적함이 태반이라 그들은 쉽게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바쿠고가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한숨을 폭 내쉬었을 때, 처음으로 키리시마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바쿠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고 키리시마는 카페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둘도 ‘우리 간다. 울지 마.’‘잘 있어, 바쿠고.’ 시선을 그에게서 거두지 못하고 키리시마의 뒤를 따랐다. 바쿠고는 문이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리고 닫힌 뒤에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카페 문에 매달린 작은 종이 딸랑이는 소리가 멈췄다.
“못 헤어져.”
바쿠고가 내린 결론이었다. 속상하고 섭섭하지만 많이많이 좋아하니까. 바쿠고는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던 휴대폰을 뒤집었다. 카톡이 끊임없이 오고 있었다.
[머리병신 : 바쿠고 괜찮을까]
[피카츄 : 토도로키랑 무슨 일 있는 거 백퍼]
[머저리 : 야 여기 바쿠고 있는 방임]
[머리병신 : 헉]
[피카츄 : 헉]
병신들…. 바쿠고는 흐릿하고 안타까운 미소를 짓고는, 카톡이 멈추자 화면 잠금을 풀고 단축번호 1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사랑 내반쪽♥] 애정이 흘러넘치는 이름이었다.
***
“나 러브라이브 보고 있었는데.”
“으응, 미안.”
“중요한 장면이었어.”
자리에 앉자마자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 감사의 백팔 배를 올려야 할 것 같다. 바쿠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리 주문해 놓았던 토도로키용 캬라멜 마끼아또를 그 쪽으로 스윽 밀었다. 마셔. 토도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빨리 말해. 단호한 음성이, 제 말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뛰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를 것 같았다. 바쿠고는 습관처럼 입 안을 잘근거렸다.
“쇼토.”
“어.”
“나, 너 무지 사랑해.”
대답은 없었다. 괜찮았다. 익숙했다. 바쿠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말, 쇼토가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쇼토도 나 좋아하니까 이해해 줄 거야. 응, 쇼토도 나 좋아하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그, 그니까아. 너도 애니랑, 음. 만화 보는 시간, 조금만 줄이고 나랑 좀 더…
"헤어지자."
"엑?"
"너 노조미랑 닮은 것도 아니었고. 안녕."
대뜸 말을 끊더니 다짜고짜 이별선고를 한 토도로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깔끔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종소리가 경쾌하게 바쿠고의 귓전을 때렸다. 혼자 남겨진 카츠키는 입술을 헤 벌렸다. 또다시, 혼자. 방금 자신이 무슨 등신 같은 이유로 차였다는 사실을 납득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헤어졌어? 차였어? 안 닮아서? 나랑 좀 더 있어달라고 했다가, 차였어? 머릿속을 뱅뱅 도는 물음들. 바쿠고는 그 무엇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꾸 마음 속 어떤 목소리가 : 응, 응, 응, 응. 그 목소리에 바쿠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너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것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사귀자며. 그래’ 그 한 마디로 자신을 속였던 토도로키에 대한 원망이나 멋대로 속아버렸던 저에 대한 미움보다는 절망과 상실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잃었다. 잃어버렸다, 너를. 같잖은 착각에 너를 잃었어. 바쿠고의 사고회로가 정지됐다. 입술 새로 빠르게 숨만 오가더니, 곧
“흐, 욱, 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씨발, 이게 뭐야.
4.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바쿠고는 학교에 가지 않고 있다. 가고 싶지도 않긴 했지만 실제로 몸이 아팠다. 감기몸살을 앓았다. 도통 열이 내리지가 않았다.
그냥 감기몸살이 아니었다.
열병, 열병이었다.
ㅡ라고 수화기 너머 키리시마가 말했다. 바쿠고는 전화를 끊었다.
“에이, 시발. 재수가 없으려니….”
바쿠고는 제가 걱정되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주는 착한 친구와 통화한 것을 재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는 코를 훌쩍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웃기는 건 전화를 끊자마자 밀려나오는 눈물이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키리시마와 전화를 하거나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울었다. 피씨방에 가서 오버워치를 하면서도ㅡ아프지만 게임은 할 수 있잖아ㅡ 울었고, 옆에 있는 사람이 못해서 그러냐고 괜찮다고 토닥이며 라면 한 젓가락을 건네도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바쿠고는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들어있는 봉지와 약 봉지를 한 손에 몰아 쥐고 눈가를 손등으로 세게 부볐다. 쇼토 보고 싶어.
“저.”
이제 환청도 들리네.
“어디 갔다 와?”
환, 청…
“기다렸어.”
안녕, 카츠키.
눈을 비비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벌건 눈이 목소리를 따라갔다. 집 앞, 익숙한 불청객. 바쿠고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그대로 멈춰 버렸다.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불청객은, 바쿠고의 반응을 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다. 슈퍼에 가기 전 피씨방을 두 시간 달렸기 때문이다. 다리가 저린 듯 무릎을 붙잡고 잠시 끙끙거리는 걸로 보아 꽤 오래 기다린 모양.
바쿠고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친 거 맞아. 미쳐서 환각을 보는 거야. 그런데 그 모습은 환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현실 같아서, 바쿠고는 제 상상력이 이 정도였나 싶었다. 바쿠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로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목소리가, 수백 수천 번은 불렀을 이름을 어색하게 담았다.
“쇼토…?”
감기 때문인지 어째선지 꽉 잠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토도로키는 몸을 바로 세웠다. 반 바퀴 돌아 바쿠고를 똑바로 마주했다. 무어라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다물고, 토도로키는 그에게 다가갔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굳어있는 바쿠고에게 토도로키가 가까워졌다.
바쿠고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심하게 차였는데도 지금, 거리가 좁아질수록 심장이 쿵쿵쿵쿵. 좋아하는 마음이 새삼 실감나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버렸다. 그리고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한 걸음, 한 방울. 한 걸음, 두 방울. 한 걸음, 세 방울. 눈물은 양을 늘려가고 늘려가더니 결국 얼굴을 흠뻑 적셨다.
“미안.”
가까워진, 바로 한 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쿠고의 입술 새로 울음소리가 새었다. 울음을 삼키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너무 슬퍼서 자꾸만 비어져 나왔다. 미안해. 토도로키가 반복했다. 바쿠고는 묻고 싶었다. 뭐가 미안한데? 왜 미안한데? 나한테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아무것도. 대신 바쿠고는 더 서럽게 흐느끼기만 했다.
“나, 너가 자꾸 생각나서,”
“으으, 흐, 우….”
“그래서 왔어.”
미안. 토도로키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혀도 말라 있어 별 소용은 없었다. 노조미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애를 보면 네가 생각나.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하도 울어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했다. 그렇지만 물기 어린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향하고 있어 토도로키는 그런 생각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못 들었으면 다시 한 번 말해주면 되지. 토도로키의 입술 새로, 그 시선만큼 단정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좋아하나봐.”
처음으로,
너를 좋아하나봐.
토도로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억, 소리를 내며 뒤로 비틀 물러났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오른 두 손이 제게 달려든 마른 등에 어색하게 얹어졌다. 바쿠고가 서 있던 자리에 그가 들고 있던 봉지들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가, 토도로키의 교복이 젖을까 화들짝 놀라 얼굴을 떼었지만
“괜찮아.”
그 한 마디에 다시 기대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토도로키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렸지만 토도로키는 불평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그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데 화내지 않아서 바쿠고는 더 눈물이 났다.
토도로키 때문인지, 일주일 내내 그토록 그치지 않던 울음은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었다. 물론 여전히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울음소리는 잦아들었다. 바쿠고의 뒷머리를 부자연스럽게 쓰다듬으며ㅡ본인은 나름 로맨틱한 행위라 생각했겠지만ㅡ 토도로키는, 멈춰가는 울음소리 새로 자그마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다시 사귀는 거지?”
“응, 으응….”
예나 지금이나, 둘 다 정말 이상해.
번외, 애인 따라 애니 보고 애인 따라…?
(소챤 @mayday_sochan 님 썰 참고)
토도로키 쇼토가 바쿠고 카츠키의 고백을 이상한 타이밍에 수락했던 까닭은 별 거 없었다. 노조미의 목소리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쿠고의 목소리가 겹쳐져 똑같은 대사를 읊는데, 이거 운명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한 달 간의 연애 동안 별로 설레지도 않았ㅡ다고 생각했ㅡ고, 그가 없어도 아니 없는 게 더 편할 게 확실하ㅡ다고 생각했ㅡ고 그래서 바쿠고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왔을 때 토도로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를 찼다. 그리고 다음 날 바쿠고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아픈 것 같았다. 나 때문인가, 했던 걱정은 바로 사라졌다. 사실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생각만 해 봤다.
‘바쿠고 많이 아픈가본데.’
‘엉, 전화 아까 해 봤는데 목소리 죽어 있다.’
걱정, 안 했다.
… 어째선지 노조미를 볼 수가 없었다. 휴대폰을 껐다. 만화책을 꺼내들었다. 훨씬 기분이 나았다.
“쇼토.”
토도로키는 제게 종종종 다가오는 바쿠고를 보며 과거 회상을 접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바쿠고는 우뚝 멈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요새 자주 보지만, 저 예쁜 웃음에 여전히 적응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바쿠고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가슴을 쭉 펴고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 너와 취미를 공유하기로 했어.
“취미 공유?”
“나도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와아, 정말?”
“응. 널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는 정말정말 잘해줘야겠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토도로키는 정말 감동받은 눈치였다. 이제는 한심하게 굴었던 시절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해봤자 미안하기만 하니까, 지금 바쿠고를 예뻐해 주는 게 당연히 훨씬 나아. 토도로키는 바쿠고를 향해 몸을 좀 더 기울이며, 상냥한 어투로 물었다.
“러브라이브?”
“아니!”
“으응… 그럼 나루토?”
“아니!”
취미를 공유하겠다면서 본인이 고집하는 애니나 만화책을 보는 게 아니라 토도로키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같은 차원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따뜻해지는 법. 토도로키는 바쿠고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등 뒤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작은 기대와 함께 지켜보았다. 일평생 러브라이브와 나루토만을 위해 살았던 제가 본 거였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애인이 처음으로 접한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바쿠고가 토도로키의 앞으로 내민 것은,
「은혼 7 - 꼭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 잘 잊혀지지 않는다」
***
너희들의 조동아리
사랑방 > 현재진행중 > 고민있어요
No.1110420
Title : 애인이 애니 주인공을 너무 좋아해요
Name : LoveLive
제곧내입니다
한 달 반 정도 사귄 애인이 애니 주인공에 빠졌습니다
옛날에는 나밖에 몰랐으면서
방에 붙여놓았던 제 사진을 떼고 그 주인공 사진 붙여놓은 거 보고 충격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죠
댓글 531개
고양이세뇌맨 : 세뇌 알바 / 1회 7만원 / 효과 보장
이어폰공구합니다 : 님 닉네임이나 고치고 말하시지
ㄴ왁스공구합니다 : 왜여 레어닉이라서 부러운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이어폰공구합니다 : 닉네임 왜이래;; 따라하지 마세요 좀 불쾌함
ㄴ왁스공구합니다 : ? 님 가입일 까셈
덴키왕자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ㅌㄷㄹ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지?
ㄴ왁스공구합니다 : 헐
ㄴ왁스공구합니다 : 그나저나 너 닉네임이 너무...
ㄴ덴키왕자님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닥쳐 어릴 때부터 쓰던 거니까
ㄴLoveLive : ㅏㄱ닥쳐ㅕ라너
토도로키는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물론 침대 위로. 토도로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도움이 될 줄 알고 가입한 사이트는 도움은커녕 이상한 사람들에 더하여 이상한 바쿠고의 친구까지 서식하고 있는 곳이었다. 저런 사람들에게 시답잖은 해결책이나 받고 있기에는 토도로키는 정말 심각했다.
고민 게시판에 올렸듯이, 바쿠고는 토도로키의 사진을 뗐다. 방 한 쪽 벽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사진들 중 이틀 밤낮을 고민하고 고민하여 하나 뗀 것이지만 그것은 토도로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게, 누, 구야.’
‘긴상!’
은혼의 남자 주인공. 토도로키는 머리가 아찔했다. 저 아저씨에게 밀렸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애인이 그토록 좋아하는데 막상 보면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어, 바쿠고가 입덕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은혼 1권을 펼쳐들었던 토도로키는 긴상인지 짧은상인지 뭔지가 나오자마자 책을 덮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쟤는 아무리 봐도 바쿠고의 취향이 아니다. 카츠키는 심각한 얼빠라고 스스로 말한 적 있는데 그렇다면 내 얼굴을 좋아하는 거고, 그렇지만 저 사람 나랑 닮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쇼토, 쇼토!”
왜,
“나 이거 샀다!”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긴상 인형!”
왜!!
“하하… 그래.”
“귀여워, 귀엽지? 너무 귀여워! 너무! 너무! 너무!”
“으응.”
토도로키는 휴대폰을 끌어안고 동동거리는 바쿠고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얹어진 토도로키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토도로키의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지만 그 대신 그의 마음이 소리치고 있었다.
날 더 좋아해 달란 말야!!
***
쇼토, 우리 집 올래?
그 말이 그렇게 설레는 건지 몰랐다. 그 집이 그렇게 가슴 떨리는 공간인지 몰랐다.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렇게 즐거운 건지 몰랐다. 집에 백발 굿즈가 있으면 어떻고 사진이 있으면 어떠하리! 토도로키는 하교하기 직전 저를 불러 세우더니, 수줍게 말해오던 바쿠고를 떠올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 그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재회의 순간 이후, 그 전과는 백팔십도 바뀌어 바쿠고가 그에게 가진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애정을 품게 된 토도로키는 시도 때도 없이 바쿠고나 바쿠고나 바쿠고의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주로 카미나리와 키리시마가 질색했다.
“어서와.”
문을 열며 웃는 네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었지, 그때. 그 날을 회상하는 토도로키의 손에는 USB 따위 들려 있지 않았다. 물론 주머니에도. 오늘은 나, 너만 보며…
“이리와, 앉아!”
너만 보, 며,
“꼭 보여주고 싶었어. 오늘, 너한테.”
너만 보… 며…
토도로키는 온몸을 스치는 쎄한 기운에 현관에서 얼어버렸다. 제게 손짓하는 예쁜 연인을, 제게 보여주는 그 예쁜 미소를 보고도 달려가지 못했다. 그의 연인은 끊임없이 손짓하며 TV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토도로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색하고 묘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렸다.
설마.
설마설마설마.
바쿠고가 리모콘 버튼을 눌렀다.
「사무라이의 나라, 우리들의 나라가 그렇게 불린 것은 이제는 까마득한 옛 이야기.」
ㅡ정말, 누가 뭐랄 까봐 꼭 닮은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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