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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학교 뒤편

하필이면 그 애가 창가 쪽에 자리한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지루하기만 한 수업 시간에 지문이 잔뜩 묻은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바라보는 것이 저번 달의 제 자리 덕에 버릇이 된 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곳에 시선을 주었을 때. 점심시간이 막 지나서 해가 중천에 떠 따가운 빛이 교실 한쪽을 채웠을 무렵에. 선생님이 목을 가다듬으며 미지근한 물을 들이키던, , 고요한 순간에.

하품이 비집고 나오려는 입술 반쯤 벌리고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돌리던 움직임은 곧 멈춘다. 눈길이 닿은 곳은 창가 바로 옆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햇빛을 온전히 받을 자리에서 조금 비껴 나가 있는데도 지금 이 공간에 있는 누구보다 하얀 것 같은 얼굴에 여기저기 헤매던 시선이 꽂힌다. , 그러면 이 페이지는. 쟤 이름이 뭐였더라. 반에 붙어있기보다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선호해 바쁘게 쉬는 시간을 보내서, 아직 반 아이들 이름을 전부 외우진 못했다. 진작 알아둘걸. 짝에게 저 애 이름을 물어봐야지, 하고 머릿속에다 몇 번이고 굵은 펜으로 메모해둔다.

아예 몸을 반쯤 틀어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하는 것에는, 그 애가 제 시선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알아차리고 눈을 맞춰주었으면 하는 마음 또한 있었다. 17번이 읽어볼까.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설레는 장면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그 맨 뒷자리는 아니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박힌 시선은 금방 돌아갈 줄을 몰라 했다. 17. 왼쪽에서 두 번째 줄, 뒤에서 두 번째 줄. 눈으로 세어본 자리의 위치는 그랬다. 왼쪽에서 다섯 번째 줄, 뒤에서 첫 번째 줄. 그 애를 몰래 쳐다본다 해도 눈치 채지 못할 거리였다. 17? 그렇게 조금 먼 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얀 피부가 그 틈에서도 똑바로 보여서, 어쨌든 흥미가 생긴 건 그 얼굴뿐이니까 말이다.

 

.

…….

, 인혁아.

.

 

문득 팔을 세게 쥐어 잡고 흔드는 것에 흐트러진 집중에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교실 앞쪽을 향해 턱짓하는 짝.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꾹 다물고 못마땅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선생님과, 제게 죄 쏠린 반 아이들의 수많은 눈동자들. 멋쩍은 얼굴로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도 훔쳐본 그 아이의 얼굴은 제 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학교 뒤편

대형견 A와 무심한 B

 

쉬는 시간에 다짜고짜 찾아가 대뜸 말을 건넸을 때 그 애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운동장 구석 먼지가 가득한 벤치에 스스럼없이 털썩 앉아 빵을 거의 물어뜯기 시작한 서인혁의 표정은 피하고 싶을 만큼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신기하단 눈으로 그 얼굴을 관찰하던 최윤주는 주먹 쥔 손등으로 인혁의 이마를 툭 쳤다. 뭐하냐? 체육 시간이 끝난 뒤라 땀에 젖은 이마에 불쾌하단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최윤주는 손등을 서인혁의 바지에 문지르며 선심 쓴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인혁은 어느새 반쯤 뜯어먹은 빵을 입 안에 욱여넣고 최윤주의 등을 확 밀었다. 순간 바닥을 구른 최윤주가 성질을 내며 바닥에 떨어진 제 빵을 조심조심 집어들었다.

 

씨발새끼야, 진짜.”

누가 거기 엉덩이 비비래?”

서인혁 무릎 최윤주 의자 아니었나요?”

 

지었던 울상을 풀어내며 곧 최윤주는 서인혁을 뒤따랐다. 흙 범벅인 팔을 그의 어깨에 걸치며 최윤주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서인혁을 툭툭 쳐댔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게 그 누구였어도 알아차렸을 텐데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이어낸다.

 

니 무슨 일 있잖아. 형님이 특별히 들어준다.”

꺼지셈. 즐 쳐드셈.”

씨발. 존나 퇴화했어?”

 

더 구겨질 틈이 남아 있었는지 성난 불독 마냥 일그러진 얼굴에 최윤주가 깔깔 소리 내어 웃어댔다. 흙먼지로 뒤덮인 손가락으로 불만투성이인 뺨을 콕 찌르고서는 살살 돌려가며 파고 들었는데, 그 손을 서인혁이 매섭게 내쳤는데도 겁내기는커녕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구냐면서 우는 시늉이나 하고 앉아 있는 거다. 역시나 이번에도 눈길 주지 않고 서인혁은 걸음만 옮겼다. 물론 그 느려터진 발걸음은 그 자리에 멈춰서 흑흑대던 최윤주의 세 걸음으로 단박에 따라잡혔다.

왜 그렇게 성을 내실까. 제 머리를 토닥이는 손을 한 번 노려보고서도 서인혁은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 그 애의 얼굴이 곧장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최윤주가 그 때 교실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끼지 못해 안달인 선배를 만나러 가야된다며 요새 쉬는 시간마다 반을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덕분에 제일 말 많고 시끄럽고 짜증나는 새끼한테는 그 창피한 장면 들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주머니에 손과 함께 구겨져 들어가 있던 빵 봉지가 바스락거리며 조금 더 면적을 좁혔다. 잠깐 세게 힘주었던 주먹에서는 스르르 힘이 풀렸고 얌전히 펴져서는 주머니 밖으로 나와 흔들거렸다.

 

, 수이야.

…….

나 알지? 서인혁인데.

…….

넌 왜 그렇게 말이 없냐? 하여튼,

 

매점이라도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용돈 받아서 지갑 사정도 넉넉한데. 짝한테 물어서 이름도 몇 번이나 곱씹고 불러본 건데. 입술까지 비죽 나와서는 마음에 들 리가 없던 한 시간 전의 일을 괜히 또 끄집어내 회상한 서인혁이 바닥을 발로 툭 찼다. 아주 작은 돌멩이가 화단에 가 부딪혀 다시금 그의 앞에 멈춰 섰다. 빙글거리다 멈춰선 것을 짜증 섞인 발끝이 한 번 더 툭. 어디가 문제였을까. 자기가 저렇게 말했을 때 의외라는 얼굴을 한 사람은 많았지만 전부 등을 두드려줬었는데. 매점이든 어디든 같이 가자고 먼저 손을 끌어줬었는데.

이름을 틀려서 그랬을까. 의외로 그런 데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든지. 가끔 말귀를 잘 못 알아 들어서 욕을 먹은 적이 있던 서인혁은 이번에도, 짝의 말을 급하게 귀에 주워 담느라 윤수희의 이름을 윤수이로 듣고 당당하게 그 애 앞에 섰던 것이었다. 아닌데, 그 작은 발음 차이를 알아차렸을 리가 없는데. 그치만 옆에 서 있던 애가 윤수희가 지나가고서는 멍청하게 서 있는 서인혁의 등을 쿡쿡 찌르면서 쟤 이름 수희야.’ 정정해줬을 정도면 발음이 꽤 티가 났던 것도 같고. 둥글게 굽은 등이나 축 처진 어깨에서 서인혁이 풀이 죽었음을 모를 사람은 없었을 거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켜서 그저 작은 관심이었던 것이 점점 크게 불어나고 있었다.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던 눈썹도 우울하게 늘어져, 곧장 저를 무시하고 체육복을 들고서 지나쳐버린 윤수희의 뒷모습만 생각하고 있는 티를 냈다.

서인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최윤주의 눈에는 웃겨 죽겠다는 기색만 잔뜩이었다. 서인혁의 일을 최윤주가 모를 리 없었다. 위층으로 달려 올라가 그렇게 싫다고 저리 가라고 짜증을 내면서도 이번에도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귀여운 사람을 열심히 놀아주고서(그 선배는 괴롭히는 거라고 항변하겠지만) 돌아온 최윤주에게, 그의 짝이 조잘조잘 떠들어댄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서인혁은 이래저래 예쁨만 받아온 녀석이라 그런 냉대가 익숙지 않았을 거다. 걔는 저한테 호감이 있는 사람만 찾아가서 아양을 떨었고 그럴 때마다 엉덩이를 토닥여주면서 아이고 내 새끼 하고 귀여움이나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선택을 잘못한 모양인지 냉대를 당했다고. 단순한 녀석이니만큼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꼬리 축 늘어뜨리고 낑낑거리는 게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말을 덧붙이자면 엄청 웃기고 조금 안쓰럽다. 옳지, 옳지. 서인혁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로 턱을 살살 긁어주던 최윤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쳐 계속 직진하는 서인혁에 우뚝 멈춰 섰다. 제 어깨에서 떨어진 팔에도 아랑곳 않고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하던 서인혁이 , 어디가?’ 살짝 큰 목소리가 묻는 것에 짧게 대답 던진다.

 

그거.”

어우, 냄새 빼고 와라.”

 

누가 들을까 소근거리듯 말하고는 유리문 열고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최윤주에게는 관심 하나 주지 않은 채, 터덜터덜 서인혁은 그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딱히 모범학교라고 할 수 없는 이곳의, 쓰레기장이 있는 학교 뒤편에서는 애들이 담배를 물어도 선생의 눈에 곧장 띄지 않는다면 혼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그걸로 말이 많기는 했지만 학생주임은 자신의 일에 큰 책임감이라든지 그런 걸 갖고 있지 않아 몇 번이나 들어온 건의에도 건성으로 감시하는 척만 했을 뿐이었다. 선생들이나 학생들이나 제 일에 파묻혀 있기 바빠 누가 담배를 피우고 무얼 하는지 대체적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최윤주가 그렇게 좋아하는 선배의 친구만 빼면 말이다. 아마 선도부장이랬던 것 같은데. 웃기는 건 최윤주네 선배(서인혁은 그 선배의 이름을 알지만 그냥 이렇게 불렀다)도 그렇게 예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바른 학교생활을 하지는 않음에도 한 번도 선도부장이라는 사람과 시비 붙은 적 없었다. 그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도 실은 서인혁은 몇 번 봤다만, 최윤주가 담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굳이 말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그 선도부장은 객관적이지 못한 권력자라고 서인혁은 비꼬았지만 최윤주는, 제 선배네 친구라는 이유로 꾸벅꾸벅 잘도 인사하고 다녔다.

별로 중요치 않은 생각 조금 하면서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는데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해져 와 서인혁의 눈매는 더 울적하게 처졌다. 짙은 한숨 내쉬며,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한 개비 빌릴 생각으로 걸음 옮기던 것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서인혁이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니 코끝을 맴도는 담배 냄새는 제 친구 중 한 놈의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안쪽으로 얼굴을 쑥 내민 서인혁은,

 

…….”

…….”

…….”

뭘 봐.”

 

윤수희를 만났다.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보나.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는 곧장 서인혁의 귀에 틀어박혔으나 그는 시선을 돌리거나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해가 어느새 저쪽으로 기울어진 그 즈음에도, 하얀 담배 연기에 가려진 얼굴이 지독하게 하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