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테루 / 리츠쇼우리츠 / 모브레이
* 에쿠테루 : 서른 남짓 회사원 에쿠보 X 여섯 살 테루키, 어쩌다보니 키우고 있음, 여행가는 중
* 리츠쇼우리츠 :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가는 중
* 모브레이 : 동거 중, 입양한 딸이 가출하자 수소문 해서 찾으러 가는 중
1. 에쿠테루
"아저씨, 아저씨."
길고 무료한 탑승 시간을 견뎌내기 위해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에쿠보는, 제 검지손가락을 꼬옥 잡고 흔드는 여섯 살 꼬마 녀석의 작은 손에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왜, 꼬맹아. 화장실 가고 싶냐?"
"화장실은 혼자 갈 수 있어!"
자존심이 상했는지 테루키는 빽 소리 치며 에쿠보의 손을 내팽개쳤지만, 금세 다시 그의 팔을 두 손으로 붙들어 온다. 저어기, 이상해. 흥미라고는 여전히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목소리가 의무적인 질문을 건넨다. 뭐가. 사람들. 즉각 따라오는 대답에 에쿠보는 무력하게 손가락을 하나 척 치켜들고 흔들며 그에 걸맞는 무력한 목소리로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꼬맹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못써."
"아냐, 바보 아저씨. 막 물어뜯고…!"
정정. 그러려고 했다. 테루키의 목소리를 삼켜버린, 그리고 끊어버린 누군가의 비명이 귀에 닿을 때까지만 말이다. 에쿠보는 눈을 번쩍 뜨고 테루키의 손을 움켰다. 늘어져 있던 얼굴이 바싹 긴장한 듯 했다. 조금 억센 손길에 아팠는지 눈가가 찌푸려졌지만, 테루키는 오히려 다른 쪽 손도 에쿠보의 손등에 올렸다. 아프다는 칭얼거림은 나오지 않았다.
에쿠보는 테루키의 손을 당겨 제 쪽으로 끌더니 일어나 그를 안아들었다. 테루키가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비명이 들려왔던 쪽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에쿠보는 저들 쪽으로 몰려오는 사람 무리를 보았다. 죄 하얗게 질려 있으며, 제 앞의 이들을 밀쳐 가면서까지 앞으로 향하려는 몸짓. 에쿠보는 뒤로 물러나 그들이 지나가는 꼴을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들과 동행해야 하나 싶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좋지 못한 선택.
에쿠보는 그 무리의 마지막 사람이 허우적거리며 달려 나가는 것을 눈으로 쫓다 통로로 나갔다. 그들이 달려온 쪽을 향해 서자 웬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람이 마지막 아니었나. 에쿠보가 작게 중얼거린다. 원인을 모르니 충분히, 더 혼란스러울 이 상황에 겁이 나는지 테루키가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는다. 에쿠보는 테루키의 등을 토닥이며 그 여자를 주의깊게 살핀다. 움직임이 이상하다.
"아저씨, 우리 여기 있어?"
자그마한 속삭임에 에쿠보는 대답해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본인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테루키가 혹여 떨어지지 않게 엉덩이와 등을 단단히 받치고 에쿠보는 상체를 기울여 여자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노력한다. 발목이 골절되었는지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여자. 에쿠보는 순간 섬짓했으나 단순히 다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녀를 도와야 하나 잠시 고민한 에쿠보는, 이제 같은 칸 안에 들어와 있는 여자의 손에 들린 것을 똑똑히 확인하고는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다리?"
여자가 들고 있던 것을 입에 물었다. 발목 부근이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에쿠보의 시야에, 그 여자의 뒤에서 기어오고 있는 또 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리가 한 짝 없었다. 에쿠보는 시선을 위쪽으로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없는 희멀건한 눈, 에쿠보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2. 리츠쇼우리츠
"컥, 흐욱, 아, 사, 살려…"
"……."
리츠는 도망치지도,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는 남자를 구해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그렇다고 어떤 말을, 또는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식은땀이 났고 그럼에도 몸은 차게 식어 으슬으슬 떨렸다. 이가 아래위로 딱딱 부딪친다. 남자는 피를 토해내더니 늘어진다. 그의 마지막 시야에 담긴 희망은 리츠밖에 없었겠지. 그를 희망이라 멋대로 정의했다면 유감이다만. 리츠는 그 죽었는지 어쩐지 모를 남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안위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것을 마주한 상황에서는. 리츠는 이제 남자에게서 흥미가 없어진 그것, 그러니까 아마도 '괴물'일 그것이 고개를 들자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리츠가 시선을 떼지 못한 그곳에 텅 빈 두 눈이 들어찼다.
눈동자가 없다하여 어딜 보는지 알 수 없는가? 리츠는 괴물이 저를 똑바로 보고 있음을 알았다. 확신, 확신이었다. 그리고 더한 확신에 찬 예상 하나ㅡ내 목을 물어뜯을 거야.
"리츠!"
그리고 그의 뒤에서 익숙한 부름이 날아와 귀에 파고들었다.
아. 그제야 탄식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작게 벌어진 입술은 떨리고 있었고, 괴물은 정확히 그 떨림을 바라보았다. 소리에 반응한 그것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지 않고 제 앞에 있는 소년에게 팔을 뻗었다. 목이 기괴하게 꺾인 이는 다리를 바르르 떨더니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동시에 리츠는 벽에 처박혔다.
악, 짧게 터진 비명을 기분 나쁜 소리가 덮는다. 정육점에서 들었던 고기가 으깨지는 소리와 유사한. 리츠는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저를 밀친 이를 보았다. 요란한 머리색, 하얀 뒷목. 익숙한 옷차림,
쇼우?
그를 부르고, 그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것 같다. 입술을 달싹이며 괴물을 신나게 두들기고 있는 뒷모습만 쳐다본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던 괴물은 곧 바닥에 착 달라붙는다. 그 모습은 사람과 다를 것 없다. 죽었나? 역시 익숙한 목소리가 자그맣게 중얼거린다. 큼, 헛기침을 하고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괴물을 혹시라도 깨울까 작은 목소리로 대꾸한다.ㅡ저에게 한 질문은 아니었으나, 대답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아닐수도. 괴물이잖아, 처음 보는."
"처음은 아닐걸."
"어?"
쇼우가 뒤돌아선다. 평소와 같은 얼굴이 평소와 같이 웃는다. 그게 조금 안심이 되어 리츠도 희미하게나마 따라 웃는다. 자. 쇼우가 리츠에게, 아까 그 괴물을 막는 데 썼던 야구 방망이를 건넨다. 그래도 쇼우의 손에는 하나가 남아 있다. 그것을 받아들면서도 리츠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도착하면 리츠랑 야구하고 싶어서!"
"…글러브는?"
"아차."
야구를 하겠다는 녀석이, 작은 타박을 주려던 리츠는 그냥 웃어버렸다. 너답다. 짧게 건네어 온 다정하지 못한 말에도 쇼우는 기분 좋게 웃으며 리츠의 손을 잡았다. 친구들한테 가자고 끌어당기는 손은 작게 떨고 있었다. 리츠는 그것을 모르는 척 했다.
3. 모브레이
"형아!"
"됐으니까, 하나자와 군. 나 괜찮으니까 저리 가!"
"테루키, 이리 와."
쇼우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테루키는 시게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거 왜 안 열려!? 잠금 장치가 고장났는지 열리지 않는 문을 잡고 흔드는 에쿠보와, 괴물들이 허우적대며 틈을 파고들려고 하는 쪽의 문을 닫으려 애쓰는 시게오를 번갈아 바라보는 아이는 울 듯한 얼굴이었다. 쇼우는 그 와중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 상황에서 울지 않고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쇼우는 테루키를 근처 의자에 앉혀두고 가만히 있으라 신신당부했다. 테루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쇼우는 에쿠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비켜봐요, 아저씨."
"어, 어."
불안한 얼굴로 물러선 에쿠보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보인 쇼우가 투명한 그 객실 문을 야구 방망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 번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았으나 이 정도 힘을 주지 않는데도 부술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문을 부숴야 함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리츠가 없어서, 아마 죽었을 거야, 아니 내가 아는 리츠가 아닐 텐데, 그래서 살 이유도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ㅡ저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어느 새 웃음기를 지워낸 쇼우가 이를 악 물고 문을 깨부수려 노력하는 것을 에쿠보는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어느새 다가와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테루키를 떼어냈다. 에쿠보는 시게오를 도와야 했다. 괴물들이 파고드는 틈이 넓어진다.
"아저씨…."
"괜찮아, 꼬맹이. 울지 말고."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테루키의 머리에 손을 얹고 부빈 에쿠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는 억지로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시게오에게 향한다. 저벅거리는 구둣발 소리, 그것이 괴물들의 포효를 뚫고 어찌 닿았는지 시게오가 버럭 소리친다. 오지 마요!! 그답지 않은 목소리, 오도카니 서서 시게오가 하는 양을 어쩌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던 아라타카가 움찔 몸을 떤다. 그러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허둥대다 시게오에게 다가가려 한다.
"도, 도와줄게. 도와줄게, 시게오."
"에쿠보 씨!!"
"…어엉?"
"레이겐 씨 좀, 부탁… 부탁해요!"
여기 못 오게 해!! 짐승같은 울부짖음, 문와 야구 배트가 부딪히는 소리 전부를 이겨내고 에쿠보에게 제 목소리가 닿게 하기 위해서 시게오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거의 비명을 지르는 식이었다. 에쿠보는 잠시 머뭇거리다, 발을 떼려는 레이겐의 팔을 급하게 잡는다. 놔. 허둥거리던 것은 어디로 보내고 단호함만이 남았음에 에쿠보는 손을 놓을 뻔 했으나 퍼렇게 부풀어 가는 시게오의 손을 보고 더욱 세게 붙든다. 울 수도 슬퍼할 수도 비통해 할 수도 없다. 하나하나를 잃는 것에 그런다면 이미 너덜너덜해져 버렸을 거야. 에쿠보는 아라타카의 팔을 아프게 쥔다. 옷 위로 손가락이 파고든다. 아라타카는 팔을 빼려 애쓰지만,
"레이겐 씨, 오지 마요! 제발, 제발 오지마."
"…시게오."
흐느낌이 묻어나는 이의 부탁에 결국 에쿠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멈춘다.
"시게오!"
조금 더 강하게 자신을 부르는 아라타카에 시게오는 잠시 뿌옇게 흩어지던 시야를 잡아챈다. 눈을 꿈뻑이며, 너무 힘을 쓰면 으레 그렇듯 이제는 굳어가려는 손에 억지로 힘을 싣는다. 눈 앞을 스쳐 가는 순간들, 아라타카와 그리고 낳을 때의 아픔 대신 키울 때의 아픔으로 사랑했던 자신들의 딸과.
호모 밑에서 사느니 빌어 먹더라도 진짜 엄마를 찾아가겠노라 집을 뛰쳐나간 딸을 다시 만나러 가던 기차에서 모든 걸 끝내게 될 줄이야.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친절하다고 시게오는 생각했다. 모두를 잊어버리게 되는 그 문턱을,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기억으로 덮어주니 말야. 처음 아이의 입술 새로 아빠, 하는 음성이 비어져 나왔을 때 그게 누구를 부른 것인지 아라타카와 싸웠던 날이 아주 느리게 수십 번은 더 스쳐 지나간다.
"레이겐 씨… 아라타카!"
"……."
"딸 만나면, 우리 딸 만나면,"
"시게오. 시게, 오."
"사랑한다고, 아빠가, 많이 사랑한다고…!"
결국 시게오는 울음을 터뜨린다. 눈물에 얼룩진 목소리는 말을 잇지 못하다 숨을 토해내며 목소리도 끄집어낸다. 그리고, 나 아라타카, 많이, 아니 제일 사랑하니까! 그거, 그거만 기억해주면… 시게오의 말은 끝까지 아라타카에게 닿지 못하고 문이 부숴지는 소리에 먹힌다. 시게오는 눈물을 토해내는 중에도 웃었다. 시게오의 손이 문을 놓는다. 문이 열리고 객실에는 곧 괴물들이 들어찰 터. 에쿠보는 가만히 서 있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를 아라타카를 세게 끌었다.
"아저씨이!"
깨진 문 너머의 또 다른 문 뒤에서 제게 손을 뻗는 테루키를 향해 에쿠보는 달렸다. 그의 손에는 힘없이 딸려오는 팔이 한 짝.
결국 너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찌른다. 아라타카는 핏덩이들에 파묻혀 가는 동그란 머리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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