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인생사 새옹지마
* 보쿠로 + 리에프 같은 학교
* 보쿠토 + 아카아시만 배구부
"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보쿠토는 집 안에서 기상과 동시에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재 시각 AM 6:40, 평소 보쿠토가 일어나는 시각보다 사십 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지각을 달고 살아 담임이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벌청소를 시키는 등 그의 지각을 근절시키려 수많은 노력을 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한 그 보쿠토가 지나치게 일찍 침대를 벗어났다.
오늘은 잘만 하면 근 반년 간을 짝사랑 해 오고 있는 쿠로오와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는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ㅡ라고, 등교 시간 제외 모든 생활이 쿠로오 중심으로 맞추어진 보쿠토가 당연스레 자신의 이른 기상 시각을 쿠로오와 엮어 생각했다. 그것은 보쿠토에게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 느그적느그적 거실을 가로지르던 보쿠토는 그 가능성을 캐치하자마자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뜨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쿵쾅대면 아랫집 삼수생 형이 민원을 넣을 게 분명하지만, 순식간에 쿠로오와 함께 하하호호 등교하는 상상이 화장실 안에서 마치 쿠로오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보쿠토는 그 무엇도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달렸다
"엌."
가 넘어져서 기절했다.
***
"헉!"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하여 약 사십 분 뒤에 눈을 뜬 보쿠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아려오는 뒤통수를 슬슬 문지르며 벽시계를 확인한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AM 7:22, 보쿠토는 입을 떡 벌린 채 화장실에 몸을 던졌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본능적으로 잠이 든 모양.
쿠로오는 무슨, 더 늦었잖아! 보쿠토에게 지각은 일상이니 그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만 오늘에야만큼은 쿠로오랑 같이, 같이!! 보쿠토는 과격하게 물을 틀고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조금 울었다.
***
AM 7:33. 버스 한 대를 1m 앞에서 놓친 보쿠토는 짜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쿠로오의 이름을 되뇌이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분노의 준비를 한 덕에 일찍 집을 나설 수 있었는데, 버스 놓치고 어쨌든 지각.
보쿠토는 톡 튀어나온 보도블럭을 툭툭 차다가 힘조절을 잘못해서 발을 세게 찧었다. 뻣뻣한 새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욱씬욱씬 아파오는 발가락에 보쿠토는 어쩌지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아, 시발… 너무 아파. 보쿠토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통증으로 인한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그러나 손을 주머니에서 빼기 귀찮아, 흐르지 않으니 괜찮다며 자기합리화를 하고는 허리를 다시 폈다.
"아, 아직도 아…"
파. 마지막 한 글자는 갑자기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에 속으로 쏙 들어갔다.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지르고 눈만 댕그랗게 뜬 보쿠토는, 허리를 곧게 한지 몇 초만에 다시 움츠러들었다.
대체 어떤 새끼야!! 보쿠토는 뒤에서 들려오는 왠지 익숙하고 몹시 경박한 목소리에 독기 품은 눈으로 그 웃음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끼긱 틀었다. 그 시야에 담긴, 싱글싱글 웃으며 양 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것은
"…쿠로오?!"
"헤이."
보쿠토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니, 밝아진 수준이 아니었다. 눈에 들어차 있던 독기는 사르르 녹아 없어진지 오래였고 자연스레 입술에는 행복해 죽겠다는 헤벌쭉한 미소가 걸렸다.
쿠로오가 자연스레 보쿠토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 강아지를 예뻐해 주는 것처럼 보쿠토의 턱을 간질였다. 그에 맞추어 입술을 모아 쮸쮸쮸 소리를 내며 보쿠토는 쿠로오를 하트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정말, 쿠로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이 전부 담겨 있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선이 익숙한 쿠로오는 보쿠토의 톡을 툭 치고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물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봐."
"좋아서어~"
"오구, 우리 부엉이."
키들키들 웃으며 쿠로오는 보쿠토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팔을 내리고 한 걸음 멀어졌다. 1초만에 왁스칠을 해서 엉망인 머리가 더 엉망이 됐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고, 쿠로오가 조금 멀어진 게 아쉬워 입술을 톡 내밀고 그 동선을 쫓았다.
보쿠토는 쿠로오와 이런 애정표현 아닌 애정표현을 하고 난 이후에는 무언가 허탈한 마음이 든다. 자신들이 무슨 '썸' 같은 관계도 아니고, 쿠로오의 저런 행동 말 모두 다른 사람들한테도 하는 거니까. 보쿠토는 하도 그를 좋아하는 걸 티내고 다녀서 몇몇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에게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처지인데 말이다.
보쿠토는 여기에서 생각을 끊었다. 고개를 휘휘 저은 보쿠토는, 짝사랑은 원래 이런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래도 나 지금 쿠로오랑 학교 같이 가잖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한 생각에 놀랍게도 기분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역시 사랑을 하면 감정이 제멋대로야. 어느 순간부터 다시 웃음을 얼굴에 띠우고 보쿠토는 '그런데 웬일로 지각?'이라 물어보려고, 생각에 빠져 있느라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리에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어? 보쿠토의 얼굴이 파사삭 구겨졌다. 보쿠토가 정말 싫다는 표정으로 쿠로오의 옆에 딱 붙어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리에프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저건 대체 언제 나타난,
'쿠로상, 안녕하심까! 우리 지각임다~'
'하이바 군, 정말 답이 없네?'
'아니, 저 아니고 우리 지각이라니까여?!'
희미하게 들려왔던 그 대화가 실제였단 말인가.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진 보쿠토의 미간이 붙을 기세로 좁아졌다.
자신을 향한 강렬한 시선을 느낀 리에프가 환히 웃으며 그 긴 팔을 뻗어 보쿠토의 어깨를 퍽퍽 쳤다. 보쿠토상은 오늘 좀 일찍 가시네여! 니가 뭔 상관이야, 하는 표정으로 보쿠토는 고개를 팍팍 끄덕였다. 리에프는 보쿠토의 머리가 똑 떨어져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말로 꺼냈다간 뺨이라도 때릴 기세라 머쓱하게 웃고는 다시 쿠로오에게 시선을 주고 잠시 끊겼던 대화를 이었다.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여?"
"엉."
알겠슴다. 저 거기서 봐둔 옷 있는데 존나 멋져여! 쿠로상도 사서 커플티 해여! 쿠로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우, 그건 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는 보쿠토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저 짧은 대화ㅡ쿠로오는 한 글자만 말했다만ㅡ를 통해 유추해낸 바에 따르면 내일 학교 끝나고 저 둘은 옷가게로 데이트를 하러 가서 커플티를 살 예정. 물론 데이트가 아닌 대학로에서 할 일이 있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였고, 커플티도 리에프가 우스갯소리로 꺼낸 말이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둘이, 단 둘이서만…
"너도 갈래?"
"……."
"야, 보쿠토."
"…엉?"
"너도 가자고, 대학로."
보쿠토가 눈만 멍청히 깜빡이며 쿠로오가 제게 건넨 말의 의미를 되짚어 보다 그제야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되었는지 환히 웃으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저 형은 목 아프지도 않나? 리에프는 딴청을 피우며 머릿속으로는 보쿠토의 목뼈를 잠시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 리에프는 보쿠토에게 안중 밖의 인물이었다. 보쿠토는 주먹을 꼭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쁜 마음을 가감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 섞인 웃음을 뱉어냈다.
"나 참, 쿠로오 씨랑 데이트 하는 게 그렇게 신나?"
"데, 데이트…?"
"데이트는 아니져, 쿠로상. 저도 있는 걸여."
"좋아! 완전 좋아!"
"아, 보쿠토상. 데이트 아니라니까여?"
투덜대며 다가오는 리에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차 없이 밀어낸 보쿠토가, 쿠로오가 그와 자신의 만남을 '데이트'라 칭한 것에 설레어 얼굴이 펑 터져 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으, 으, 쿠로오 진짜 심장에 안 좋아. 그리고 그 때였다.
"보쿠토상 오늘도 지각이십니까."
"어, 케이지 군도 지각? 웬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보쿠토상,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들어 버렸는데 말입니다."
응?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제 어깨를 툭툭 쳤을 때야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그제야 제게 시선을 주는 모자란 선배에게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보쿠토상, 오늘 내일 연습 있으신 거 아시는 거 맞죠?"
보쿠토상, 오늘 내일 연습 있으신 거 아시는 거 맞죠?
오늘 내일 연습 있으신 거 아시는 거 맞죠?
내일 연습 있으신 거 아시는 거 맞죠?
내일 연습 있으신 거
내일 연습
내일
"……."
순식간에 공허해진 표정에 아카아시가 깔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잊으신 거 같아서 말입니다. 쿠로오가 정말 가엾다는 표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보쿠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저런. 수고해라."
그리고 쿠로오는 제 앞에 멈추어 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리에프도 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며 쿠로오의 뒤를 따랐다. 아카아시는 진작 버스에 탑승하여 자리를 잡은지 오래였다.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의 뒤꽁무니를, 정류장에 홀로 남은 보쿠토만이 멍하니 쫓고 있었다.
…하하,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