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겁페

[아라토도] 백 송이 장미 (2 : 세 송이)

pdom1nt 2016. 3. 27. 00:45

 

낭패. 체육복을 안 가져왔다.
다음 시간이 체육이라 부산스레 옷을 벗어 제끼는 녀석들도, 볼 게 뭐 있다고 굳이 화장실로 후다닥 자리를 옮기는 녀석들도 있었다. 여자애들은 진즉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갔고. 도심이 아니라 학교 시설이 좋지 못해 탈의실이 없어, 다들 축축한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어야 했는데 꽤나 익숙해진 모양인지 불평불만 없이 재잘거리며 교실을 벗어나더라. 이 전에 미리 체육복으로 갈아 입어 놓았던 애들은 교실을 어슬렁대며 같잖은 시비나 걸고 있었고… 나는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들을 관찰 중이었다.
전학 사 일 째, 아직 외부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나를 아이들은 흘끔흘끔 쳐다 보기만 할 뿐 그 어떤 접촉도 해 오지 않았다. 쟤 왜 가만히 있어, 소근거리는 여자애의 목소리도 들려 왔건만 여전히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완전 왕따 같잖아 이거… 왕딴가.
콕콕 찔러오는 시선이 싫어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억울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진 않았다. 나를 향한 눈빛에 담긴 것은 악의가 아닌 단순한 궁금증임을 알지만 내키지 않아서, 예비령이 울릴 때까지 그냥 그러고 있었다.

"야!"
"… 어, 어?"
"문 니가 잠그고 가!"

어, 으, 응. 어느새 조용해진 공기를 뚫고 들려 오는 갑작스런 외침에 고갤 팍 들고 대꾸했지만 그 뒤에 들려오는 말에 담긴 내용에 김이 팍 샜다. 우울하게 대답하자 앞문에 쏙 내밀고 있던 낯선 얼굴이 쏙 사라졌다. 쟤 우리 반이었던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허공을 빤히 쳐다보다 무거운 엉덩이를 느릿느릿 떼었다. 최대한 천천히.

이렇게 가면 혼나겠지. 전학 왔다고 해도, 이미 체육복 받은 거 아니까.
재수 없게도 내게 체육복을 직접 건네준 게 우리 반 수업에 들어 오는 체육 선생이었으니. 어? 3반? 수업 시간에 보겠네. 찰지게 때리던 털이 숭숭 난 손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어쨌든. 아, 주목 받는 거 싫은… 데?

녀석이다. 아까 그 애가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그 자리에 녀석의 얼굴이 있다. '녀석'이라는, 정 없는 호칭으로 부르기는 나도 내키지 않지만 이름을 알아야지. 저번에 봤을 때도 저저번에 봤을 때도 교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에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아 이름을 알 턱이 없었다.
아무튼 하루 걸러 보는 녀석의 얼굴은 좀 반가웠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이 학교에서 나에 대해 '무(無)'가 아닌 '호(好)'의 감정을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테니.

오늘도 꽃을, 주러 온 걸까.

하지만 나를 보러 온 건 아닌지 그 시선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다른 누군갈 찾으러 온 교실에 나밖에 없어서 당황한 건가.


"너…."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내가 무언가 말하려 운을 떼자 화들짝 놀라 무언가를 저와 가장 가까운 책상에 던지듯 놓고 사라진다. 뭐야. 어정쩡한 자세로 그것을 쳐다 보고만 있는데

"너 입어!"

갑작스레 뒷문이 덜컹대고, 잠겨 있던 탓에 열리지 않아 그 창문에 얼굴을 바싹 들이 민 녀석의 목소리가 답답하게, 하지만 확실히 들려 왔다. 자리가 맨 뒤, 창가 옆인 터라 고개를 돌리니 녀석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바라 보고만 있자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달아나 버렸다.

녀석이 무언가를 놓아둔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니 급히 놓다 보니 그것이 떨어졌는지 텅 비어 있었다. 미적미적 걸어 가다 종이 울려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 씨."

무조건 혼나겠네, 이거. 작게 투덜거리며 그 옆의 책상 앞에 서자,

"……."

체육복이 떨어져 있었다.
급히 그것을 주워 들자 손에 잡한 것은 윗옷 하나였고 바지는 딸려오다 툭 떨어졌다. 그런데 옷이 떨어지는 소리와 다르게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쭈그려 앉아 바지를 줍는 대신 살짝 옆으로 치워 보니, 투명한 상자.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것.

"와."

네가 내게 준, 세 번째 장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