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세상의 끝에서
온 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여기저기 옷에 탄 자국이 선연한 두 남자가 써 있다. 얼룩덜룩한 옷 하며 잔뜩 닳은 군화, 한 남자가 쓰고 있는 딱딱한 군모를 보아하니 군인으로 추정된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둘이 같은 부대 소속이 아님을 보여준다.
서로 오가는 말은 없었고 서로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조금 더 키가 큰 남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생명체라곤 작은 풀뿌리 하나 없는 것 같은 이 땅의 저 너머를 한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군모를 쓰지 않아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그대로 드러난 또 다른 남자는 그 뒤에서 발을 들고 너덜거리는 장화 밑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키 큰 군인 그러니까 쿠로오 테츠로가 제 뒤의 보쿠토 코타로에게 나직이 말을 걸었다. 여전히 얼굴은 마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만할까."
그 목소리는 밥이나 먹을까, 하는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보쿠토는 그 내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끝을 고하려 한다는 것이 보쿠토에게는 뒤늦게 다가왔다.
"… 어?"
"그래. 그만하자, 그냥."
"쿠로오."
"나, 조금 많이 지친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빙글, 보쿠토를 향해 뒤를 돈 쿠로오의 얼굴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미소는 참으로 착잡하고 슬퍼 보여 보쿠토는 그것을 외면하고 고개를 매구 저었다. 그 말의 의미를 자각하자 순식간에 눈을 그득 채운 눈물이 쿠로오의 얼굴을 흐릿하게 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울먹이는 보쿠토를 쿠로오 역시 모른 체 했다. 머리에 씌워진 딱딱한 군모를 천천히 벗어 들고 쿠로오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보쿠토는 그것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과도 같아 보여 무서웠다.
눈 떠!! 곧바로 들려오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쿠로오는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보쿠토가 성큼 다가서 쿠로오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눈 떠, 쿠로오. 작아진 목소리가 채근하듯 쿠로오에게 닿았지만 쿠로오는 그저 웃었다. 보쿠토. 힘 없는 그 다정한 목소리에 보쿠토가 애원했다.
"쿠로오, 제발."
"죽자."
"안 된다고!!"
"죽자, 보쿠토."
끝내 뱉어진 말에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얼굴을 뒤덮은 더러운 먼지를 씻어내며 새까맣고 낡은 군화에 한 방울 두 방울.아직 안 끝났어, 아직… 그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지 마. 하얀 눈물 줄기가 일그러진 얼굴에 점점 번졌다. 흔들리는 목소리에도 쿠로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보쿠토가 입술을 꼭 깨물고 그 새로 미어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틀어 막았다. 상처가 벌어져 비릿하게 피 맛이 났으나 그보다 울음을 참는 것이 먼저였다. 질질 짜기나 하는 나약한 녀석이 무슨 말을 하든 쿠로오는 듣지 않을 거야. 그래서 보쿠토는 우는 모습을 보지는 않으나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쿠로오에게 울음 소리가 닿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쿠로오가 입술을 열었다.한동안 다물고 있던 두 입술 새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바싼 마른 혀가 피딱지가 굳은 입술을 쓱 훑고, 아까보다 더 무미건조해진 목소리가 말했다. 보쿠토는 그 말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서로에게 총을 겨눌 때
서로의 진영에 불을 질러 쫓기듯 몸을 피할 때
그리고 너를 만나 여기까지 기어올 때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어.
감정을 철저히 숨긴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속에서부터 열이 울컥 끓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몸 밖으로 빼내지 않으면 그것에 잠식되어 타 죽을 것 같았다. 그것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게 했는데, 하지만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난, 난 너가 살아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했어."
근데 왜, 너는 왜! 악쓰는 목소리가 단단히 막힌 목구멍을 터뜨리고 삐죽삐죽 비져 나왔다. 그에 쿠로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보쿠토는 괴로운 듯 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쿠로오는 보쿠토에 말에 대답을 건네지 않았다. 그는 대신 그의 말만을 계속했다.
"여긴 어디지?"
"……."
"우린 살기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어?"
"몰라, 몰라. 그치만,"
"우린 살 수 있어?"
보쿠토가 납덩이처럼 축축 늘어지려는 두 손을 억지로 들어 쿠로오의 옷깃을 꼭 붙들었다. 나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있지, 쿠로오.
"살아줘."
"……."
"어떻게든, 살아줘 쿠로오…."
상처투성이의 손이 마구 떨리는 것이 쿠로오의 손끝까지 전해졌다. 얼굴을 쿠로오의 가슴팍에 파묻고 보쿠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아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없는, 황량한 세상의 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