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른] 161130~161218 조각글 정리 (5개)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게 다였다. 내가 너에게 달려갔던 이유는 그것 뿐이었다. 네 이름을 울부짖었던 이유도 그것 뿐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너는 나를 구웠하였고 나는 너에게 구원되었다. 너의 손길은 나에게 닿았으나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나의 흐느낌은 너에게 닿지 못하리라.
소멸하여 버린 그대의 숭고한 불꽃이여. 나는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나의 사람, 품이 너무나도 넓어서 전부를 안으려다 감당하지 못해 죽어 버린 사람. 눈이 보이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나는 한심하게도, 네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너를, 너를, 너를 조금 더 많이 바라보고자 눈을 감는 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
아.
아.
죽음이라는 것은 왜 이리도 날카롭고 서늘한지. 너와 내가 잠시 마주 잡았던 손을 어찌하여 당연하다는 듯 끊어내는지. 나는 네가 아니면 숨을 쉴 수 없음에도 어떻게 살아가는지.
비참하구나, 모든 것이. 세상은 지나치게도 많은 모순으로 덮여 있고 겁쟁이에 불과한 나는 오늘도 죽지 못하였으니.
"형. 형. 형."
"왜 자꾸 불러."
"혀어엉."
어릴 적처럼 말꼬리를 주욱 늘린 부름에는 울음기가 조금 묻어 있는 것도 같아 결국 다자이는 고개를 돌렷다. 무시라는 전략이 먹힐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었나 보다. 소파에 파묻혀 리모콘 버튼이나 눌러대던 그를, 꼿꼿이 선 채로 계속 바라보던 눈은 이미 벌개져 있다. 다자이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아츠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며 다만 입술을 깨물었다. 견뎌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무감정한 눈은.
눈을 감으면 눈물이 곧바로 흘러내릴 것 같아 필사적으로 부릅 뜨고 있으려 했지만 눈은 제멋대로 감겼고 눈물이 톡 떨어졌다. 다자이의 입술 새로 힘겹고 긴 한숨이 샌다.
"울지 마."
"우는 거, 읏…."
우습게도 부정하려 했나 보다. 그러나 입술을 벌리자마자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고 눈물이 얼굴을 적신다.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뺨이 얼룩진다. 손등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울음을 삼켜 보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다자이는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츠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츠시는 그게 서러워 도저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 다자이는 자기를 좋아하는 대학 선배가 데이트 신청을 해 오자 거절을 할 수 없어 (모토 : 싫은 녀석도 옆에 두는 원만한 사회생활) 주말에 만났는데 아츠시가 애들이랑 놀러 갔다가 그걸 봄 그 이후 다자이한테 내내 누구냐고 여자친구냐고 물었는데, 아츠시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안 다자이는 그 감정이 지속되면 좋은 거 하나 없으니까 (다자이가 게이라는 게 소문이 나서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자!) 그냥 여자친구라고 거짓말 함 그 직후 상황으로 아츠시가 다자이 집에 쳐들어 옴
* 오다사쿠 앞에만 서면 무지 애처럼 구는 주제에 자꾸 형이라고 부르라고 떼 쓰는 태재와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절대 형이라고 안 불러주는 오다
"다자이."
"어허, 오다사쿠."
"형이라기엔 너, 너무 작고 애 같은데."
"너? 너? 너?"
오다는 귀찮다는 듯 손을 슬슬 휘젓다가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다자이가 빽빽거리는 소리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였다. 다자이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오다의 한 쪽 손목을 두 손으로 꾸욱 잡더니 귀로부터 떼어내려는 양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역부족인가. 결국 실패다. 다자이는 패배의 고통에 가슴께를 부여잡고 조금 으르렁거리더니 뒤를 휙 돌았다. 일부러 발소리를 쿵쾅쿵쾅 내 가며 멀어지는 다자이를, 오다는 뒤에서 아니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봐, 저 봐. 저러면서 뭘 자꾸 형이래.
"이거야 원, 이능력도 아니니."
허탈하게 웃음을 토해낸다. 최강이라 칭송받던 이능력이 실제의 힘과 체격 차이 앞에서는 단순한 접촉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조금 가혹한 것도 같다. 눈가에 열이 몰리는지 팔을 들어 가린다. 그러나 그것마저 곧 제지된다. 억센 손에 붙잡힌 손목이 아리다. 이제 양손마저 포박되었으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 하나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입술을 단정히 다분다.
무슨 말을 해도 구차해진다. 고고한 자존심을 꺾어내릴 가치가 과연 있는 것인가. 그저 이 한 몸으로 별 것 없는 수치를 견디어 내는 것이 답이지 아니할까.
"간부 나리."
"……."
"어쭈, 대답을 안 해."
뒈지게 패면 말할 거지, 응? 위협하며 손을 높이 들길래 가만 시선으로 움직임을 쫓았다. 손을 따라가는 눈동자를 눈치 챘는지 비소를 터뜨리더니 별 다른 위해 없이 팔을 내린다. 이런 데 쓸 시간 없다며 중얼거리더니 붙들었던 손목을 한 손에 몰아쥔다.
텅 빈 손은 코트자락을 급히 벌려낸다. 순간 웃음도 울음도 담지 않은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웃음도 울음도 담지 않은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온다.
"이런 걸 해서…, 얻는 게 있는가?"
"엉."
"자네 마음의 단순한 기쁨?"
"닥쳐 봐, 좀."
성가시다며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꼭꼭 잠긴 셔츠 단추를 억지로 뜯어내려 한다. 다자이는 한숨을 얕게 내쉬었다. 우매한 족속, 그 중 하나겠거니. 다자이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시선은 천장.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다.
"아, 망했다."
아츠시는 허탈하게 중얼거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더 움직이는 것은 무리다. 한참을 걸어 왔지만 아는 복도가 나오기는커녕 다리만 아프다. 조금만 더 가 보자, 조금만, 하던 미련을 버리고 아츠시는 드디어 결심했다 : 길을 물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여기 가만히 있자.
텅 빈 복도에 홀로 서 있는 것이 괜히 뻘쭘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2학년 C반, 눈에 들어온 표시에 위치를 짐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반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학한지 일주일. 괴상한 학교 구조에 외운 길이라고는 교문에서 교실, 그리고 교실에서 급식실로 향하는 방법 뿐이었다. 아, 하나 더. 교실에서 화장실 가기.
어쨌든 이런 비운의 길치에게 이와 같은 시련이 왜 찾아왔느냐. 오늘의 마지막 교시는 체육이었다. 체육복 차림으로 하교하고서 아츠시는 교복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현관 앞에서 알아챘다. 교복을 찾으러 학교에 다시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행하게도 담임 선생님을 만나 교무실에 끌려갔다. 아츠시는 잔업 몇 개를 도와드리고 사탕을 두어 개 받았다. 교무실을 나와 교실을 찾아 떠났다. 그리고 모든 사탕이 입 안에서 녹아서야 멈추었다. 남은 것은 손에 꼭 쥔 사탕 껍질 뿐이다.
아츠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여기 자리를 잡은 이후 대략 열 번째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갑자기 귓가에 누군가의 은밀한 속삭임이 스며든다.
"땅 꺼지겠네."
"…히이익!"
몸을 휙 틀고 후다닥 뒷걸음질 치자 눈에 들어온 건
"에, 놀랐다면 미안."
"……."
"뭘 그렇게 보나?"
지나치게, 지나치게 잘생긴 사람!
아츠시는 그가 자신을 놀라게 했다는 사실도 잊고, 자기가 길을 물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마저도 지워 버리고, 홀리기라도 한 양 멍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다 혹시 뭐 묻었냐며 자신의 얼굴을 더듬는 남자를 보고 아츠시는 생각했다.
내가 만지고 싶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한 대 쳤다. 정신을 차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저를 이리저리 살피는 남자..., 가 아니고. 다자이 오사무. 명찰을 슥 훑고 아츠시는 다자이와 눈을 맞추었다. 다자이가 물었다.
"괜찮은가?"
"아, 네. 네에, 완전 괜찮습니다. 하하, 정말요. 조금 미친 것 같지만 괜찮아요."
횡설수설하는 아츠시를 남자는 오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괜찮다면 할 말이 없지! 그러고는 한 발 다가와 아츠시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래도 너무 힘들면 상담 서비스를 이용하게나. 이 학교의 상담소는 무지 괜찮다고?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였나 보다. 그럴 수 있지, 제 상태를 알고 있어 슬프게도 본인마저 납득했다.
"내가 상담원이니 말야.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와, 신입생 군."
"아, 예…."
"어디보자, 이름이… 나카지마 아츠시. 응, 아츠시 군."
제 체육복에 달린 명찰을 톡 치고 빙글 웃는 다자이에 아츠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쩜 목소리도 저리 좋을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황홀하다고, 유치한 감상을 머릿속에서 늘어놓던 아츠시는 '그럼 난 이만.' 뒤돌아 손을 팔랑이는 그에게 허리를 푹 숙여 봐주지도 않음에도 성실한 인사를 건넸다.
경쾌한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다자이는 제가 앞에 서 있던 반, 그러니까 2학년 C반 뒷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들이고 있었다. 문이 쾅 닫혔다. 아츠시는 몸을 바로했다.
다자이가 정말 잘생겼다는 생각을 닫힌 뒷문을 보며 서른 번 정도 더 곱씹은 아츠시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발을 떼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그리고는 무언가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맞다."
나 길 잃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