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쿠캇] 좋아해서 그랬어 上
* 임신물
"야, 데쿠. 화 났어?"
"데쿠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미안."
이즈쿠는 한숨을 옅게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데쿠든 뭐든 카츠키한테 어떻게 불려도 상관 없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아빠가 아빠를 등신이라고 부르는 게 아이한테 좋을 것 같냐고 타박을 주셨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조금 화나 있어 말이 모나게 나왔던 거지 절대 호칭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넨, 분명 움츠러 들었을ㅡ임신을 하고 나서는 작은 것에도 겁을 쉽게 먹더라ㅡ 카츠키를 다독여 주기에는 기분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래, 집에서까지는 정말 좋았다.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회사에 월차를 내서 전날 퇴근하고 나서부터 카츠키와 하루종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들떴던 거다. 이런 예쁜 사람이 제 아이를 가져주다니 행복에 겨웠다는 생각만 했다,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예쁜 얼굴 쳐다보기만 하는 데 오전을 전부 보내고, 느지막히 깨서 부루퉁한 얼굴로 눈을 부비는 카츠키를 꼬옥 끌어안고 한참을 있다가 짜장면이 먹고 싶다길래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카츠키는 여느 임산부들처럼 뭘 먹고 싶다는 말도 잘 안 했고 입덧이 심해서 무언가 가져다 줘도 먹지를 못했다. 오랜만에 먹고 싶은 게 생겼다니 설레고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불편할 카츠키를 생각해 시켜 먹으려고 했지만 '기분 전환 하고 싶어.' 눈도 못 뜨고 칭얼거리는 카츠키에 이즈쿠는 카츠키를 꼬옥 안고 화장실로 엉거주춤 걸어갔었다.
'…나 못 먹겠어.'
'이거 별로야? 그럼 내 거 먹을래?'
'아, 아니. 그, 미안. 집에… 가면 안 될까.'
그렇지만 역시나였다. 갑자기 먹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에 마냥 기뻐하기만 해서는 안 됐던가. 활짝 핀 얼굴로 제 팔짱을 꼭 끼고 재잘재잘 평소와 다르게 이것저것 풀어놓던 카츠키는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아지더니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고개를 푹 숙이고 저렇게 말했다.
이즈쿠는 속상했다. 속상해서 화가 났던 거다. 임신하고 잘 먹지를 못해 잔뜩 말라 버린 것도, 건강 나빠진 것도. 그래서 맛있는 거 전부 먹여주고 싶은데 이렇게 아기가 거부하는 게 너무 속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잘못인 양 눈치를 보고 있던 카츠키에게도 화가 났다. 당연한 거잖아, 힘든 건 너잖아. 왜 그렇게 미안해 하는 거야.
이즈쿠는 말없이 일어나 계산하고 나와 버렸고, 카츠키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 뒤를 따랐다. 괜히 쉬는 날 이즈쿠를 화나게 했다며 카츠키는 속으로 마구 자책했다. 몸이 약해지고 감정도 이리저리 뒤죽박죽. 별 거 아닌 일에도 속이 뒤틀리고 우울해지다보니 이전의 날카롭던 모습은 찾기가 힘들 정도로 카츠키는 변했다. 사근사근해진 카츠키도 물론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이전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카츠키를 아기가 없애 버린 것 같아 이즈쿠는 카츠키가 가여웠다. 고맙고, 항상 미안한. 그래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둘이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근처의 가게였기 때문에 곧 아파트 건물로 들어섰다. 계단. 카츠키에게는 아주 고역일 계단이 나타났다. 이즈쿠가, 올라야 하는 계단의 반 정도 올랐을 때였다.
"잠, 깐만."
"……."
"……."
이즈쿠는 입술을 꾹 깨물고, 숨을 헐떡이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계단을 올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뒤를 돌 수가 없었다. 임신은 카츠키가 했는데 제 감정 기복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속상하기도 하고, 그것을 카츠키에게 풀려는 듯 못되게 구는 자신이 싫었다. 정말 잘해주고 싶은데, 어떡해. 이즈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제게 화를 내지도, 한 번 더 부르지도 않는 카츠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더 아무것도 못 하겠는 거다. 뒤에서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렸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이즈쿠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지금은 카츠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빨리 마음을 추스리고 정말 미안하다고,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라고 사과해야지.
그리고 이즈쿠는 정말, 카츠키를 두고 집에 들어가 버렸다.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씨잉…."
카츠키는 코를 훌쩍이며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찬 데 앉으면 안 된다고 굳이 저를 일으킬 이즈쿠가 옆에 없는 게 너무 서러워서 카츠키는 꾸욱 참고 있던 눈물을 짜내었다. 손끝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카츠키는 이제 미안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잘못한 게 뭐야? 내가 잘못한 게 뭐야? 왜 화를 내? 왜 나 버리고 가? 카츠키는 입술을 마구 일그러뜨리고 손등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난 잘못 안 했어."
작게 중얼거린 카츠키는 분명 발개졌을 콧등을 슥 문지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아가한테 안 좋으니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 아프고 우울해서 가만히 앉아있고 싶었지만, 잠깐 앉아있는 동안에도 아기한테 미안해서 카츠키는 편하게 앉아 있지도 못했다. 아직 어리고 여리지만 엄마는 엄만가보다. 배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몸이 무겁고 힘들어 계단은 정말 질색이지만, 카츠키는 까마득해 보이는 계단을 하나하나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가서 데, 아니. 이즈쿠랑 얘기를 해야겠어.
***
"괜찮겠지."
이즈쿠는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손톱을 잘근거리며 이즈쿠는 거실을 마구 돌아다녔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빠르고 세게 걸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바로 카츠키가 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알고 빠르게 마음을 추스리고 할 말을 정리한 이즈쿠는 십 분 째 감감 무소식인 문을 자꾸만 들여다보며 불안함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아냐, 아직 십 분 밖에 안 지났잖아. 캇쨩 화나서 조금 이따가 들어오려는 거겠지. 이즈쿠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는 정확히 일 분 뒤 문을 박차고 나섰다.
"캇쨩?"
조심히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소리가 울려서 듣지 못했을 리도 없는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즈쿠는 제가 십일 분 전 올랐던 계단을 조급하게 내려갔다. 괜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괜히 무서워서 걱정돼서 다급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몸이 따라주질 못해 넘어질듯 말듯 삐끗거렸지만 이즈쿠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전부 내려간 계단에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