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하이큐

[보쿠로] 피터팬

pdom1nt 2016. 7. 22. 22:42

* 보쿠로 전력 3회 <창가>



나는 어렸다. 지금으로부터 아주아주 먼 옛날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 시절 상상 그대로를 사실처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세세해서 그저 내 상상이라고 치부하기는 조금 미안할 수준이라는 거다. 기억 속 낯설지 않은 남자의 얼굴도, 목소리도, 몸짓도, 표정도 전부.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오래 전에 결정했다. 떠올리기에 나쁜 기억은 아니니 그냥 나만 아는 사실로 함께해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좋은 쪽?

그래서 괜히 매일매일 떠올리는 중. 다들 할 게 없을 때 가만히 누워 종종 상상을 하거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곤 하지 않는가. 나는 딱히 행복했던 기억이 없어서, 사실은 기억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지만, 어쨌든 그래서 떠올릴 수 있는 건 그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기억뿐인 것이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정말 많은데. 아마ㅡ 하루의 대부분. 그치만 기억나는 즐거웠던 일은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뿐이라서 지금도 나는 그 시절로 시간을 되감고 있다.


「왜 울고 있어?」


처음 그가 건넨 말. 멋을 내고 싶었던 건지 영화처럼 창틀에 앉아 불편하게 기대어, 싱글 웃으며 사탕을 건네던 그 남자에게 나는 마음 속으로 그를 피터팬이라고 불렀다. 그 어떤 건물의 그 어떤 창만 봐도 내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어도 나는 그곳에 기대고 있던 피터팬이 생각이 난다.


「자, 날 따라해봐.」


사탕을 억지로 조그만 내 손에 쥐어주고 제 입술을 쭈욱 늘리며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던 남자는 어른이었지만 어렸다. 순수했고 맑았고, 정말 피터팬처럼. 피터팬과 다른 점은 초록색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과,


「스마아아일.」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는 것.

무슨 새의 날개였던 것 같은데, 그 무늬까지도 또렷이 기억이 나지만 정확한 종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류학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추측은 해 봤는데, 부엉이. 인터넷의 수많은 부엉이 사진 중 한 녀석의 날개와 꼭 닮았었다. 그래서 며칠 간 그 남자를 피터팬 대신 부엉이 아저씨, 라고 불렀었는데 아무래도 피터팬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아 관뒀다.

피터팬. 그 남자는 나를 매일같이 찾아왔지만 도저히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멋대로 지은 것이었다. 어린 나는 그게 마음에 쏙 들어, 열 번짼가 만났을 때 저도 모르게 그를 피터팬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자 피터팬 책을 건네며 읽어달라고 말실수를 무마했었고. 남자는 '테츠로는 아가야?' 놀리면서 즐거운 듯 웃고는 어울리지도 않는 아주 나긋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어 주었었다. 그 목소리가 담는 내용보다는 목소리 자체에 집중한 채 누워 있다가 스르륵 잠들었고, 눈을 뜨니 아침. 그는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어서 혼자 침대에 누워 퐁퐁 눈물을 쏟았었지.


「잠꾸러기 안녕.」


멋대로 잠들어 버려서 착한 피터팬도 화가 나 다시는 안 찾아오면 어떡하지, 했지만 평소처럼 창문으로 얼굴을 쓱 들이미는 그에 안심했고 다시 눈물이 펑. 얼굴을 주물거리며 울지마 울지마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다.


아, 피터팬이랑 다른 점 하나 더. 그 남자는 절대로 집 안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불편하지 않아? 그에게 손을 뻗으며 방 안으로 초대했지만 소리내어 웃더니 자기는 여기가 좋다고, 굳이 창틀에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았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 나는 종종 어딘가로 데리고 가곤 했…


"아아아아, 그만."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퐁, 하고 사라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입술 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그 남자의 기억을 떠올리면 왠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회상을 끝내면 더 비참해진 것 같은 기분. 그 때 행복했… 던가. 어쨌든 지금보단 훨씬 나았을 우리 집의 분위기도 괜히 상상하게 돼서 한층 더 우중충해지는 거다. 물론 기억하는 그 순간 만큼은 하루 중 가장 기뻐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생각, 자주 하기도 하고 말야. 그치만 너무 기뻤던 기억은 안 되고 너무 오랜 상상도 안 돼. 지금은 특히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나이도 이만큼이나 먹어 놓고 다시 만나길 바라게 되니까 말야.


"스마아아일."


손을 뻗어 불을 끄고, 방 한가운데 웅크려 눈을 꼭 감고. 괜히 그 사람의 말을 따라해보며 빙글 웃었다. 입꼬리는 금세 축 처져 아무 소용이 없지만. 어쨌든 내일도 살아야 하고 모레도 살아야 하고, 오늘도 살았는데 다음이야 못하겠어. 무릎을 꼭 껴안고 쓸데없이 불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아."


아까는 눈을 감으면 사라졌던 피터팬의 얼굴이 지금은 눈을 감아도 떠올라 눈을 다시 떠버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잔상이 기분이 나빠 눈을 쓸데없이 깜빡여봤다. 그러면 잠시 일그러졌다가 선명해지는 탓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다시 등을 대고 편하게 누웠다. 그런데 방이 좁아 딱히 편하지 않아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결국 자그맣게 창문이 나 있는 쪽으로 몸을 틀고 누웠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닫혀 있는 창문에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방글방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남자는 나와 시선이 섞이자 더욱 눈이 휘어져라 웃으며 말을 걸기까지 했다. 


「왜 울고 있어?」


안 울어.

손등으로 눈을 부볐다.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개구진 얼굴.


「자, 날 따라해봐.」


웃기지도 않아.


「스마아아일.」


짜증나. 괜히 눈물이 나왔다. 스마일은 무슨 스마일이야. 약에서 깨지도 못했는데 지각했다고 혼내던 마담, 술은 지가 먹여 놓고 제대로 못한다고 죽어라 때리던 아저씨, 나는 왜 지명이 안 되냐고 나를 붙들고 울던 친구ㅡ 썩어빠진 오늘이 피터팬의 기억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눈앞의 피터팬이 일렁이더니 사라져 버렸고.


"뭐냐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을 감았다. 이제는 피터팬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일주일 전도 그랬듯이 괜히 친구가 되어줄 것마냥 왔다가 그냥 가버리는. 정말 나빠. 그 시절의 나를, 그 시절의 가족을, 그 시절의 피터팬을 너무 간절히 원해서 내가 보는 환각이겠지만 그래도 괜히 버림받은 기분이라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치만, 그치만 저게 정말 피터팬이라면. 벌떡 일어나 흐르려는 눈물을 슥슥 닦았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눈이 아팠다. 장난, 정말, 싫어. 버석버석 갈라진 입술을 하도 씹어대 피맛이 났다.


「잠꾸러기 안녕.」


어쩌면,

머리도 들이밀기 힘든 아주 조그만 창문을 바라보면서 우습게도 나는 아직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