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쿠캇] Just be friends
bgm : 구루타밍 - Just be friends
* 괜찮아, 괜찮아. 1 - 번외 (1)
* 옆집 회사원 X 애 딸린 이혼남
"……."
"…아, 안녕."
"어."
어색한 인삿말에 짧게 대꾸한 카츠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지나쳐, 최대한 빠르게 계단으로 향했다. 슬리퍼를 직직 끄는 소리가 이른 아침이라 적막하기까지 한 빌라 내부를 채웠다. 곧 황급히 저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카츠키는 고개를 더욱 숙이고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지금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이틀 전 감정의 소용돌이와 어린 아들의 설득 아닌 설득에 휘말려 그의 집에 무작정 찾아간 이후 지금 처음 보는 것인데,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날의 일이 너무 창피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문을 열어주던 그에게 다짜고짜 안겨들어 울음을 터뜨리고, 먹여지고, 재워지고… 카츠키는 이 부끄러움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 여전한 심란함까지 더해져서 왠지 그의 얼굴을 보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
입술 새로, 이즈쿠에게 들릴락 말락 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의 시작부터 머리가 아파졌다.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이 예정에 없던 만남 탓에 짜증나게 전부 엉켜버렸,
"아."
카츠키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생각도 전부 멈췄다. 그에게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하나 아니 말을 거는 게 맞기는 한 건가 내내 고민하던 이즈쿠도 덩달아 멈춰섰다. 역한 냄새가 복도에 퍼졌다.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 카츠키가 복도에 세워져 있는 작은 옷장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왜 여기 세워두고 지랄이야! 이즈쿠 앞이기도 했고ㅡ이미 이즈쿠는 그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서도ㅡ 다들 자고 있는 아침이기도 해 속으로만 버럭버럭 소리 지르고서 카츠키는 바닥을 보고 걷느라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가구에 부딪혀 날아가버린, 터져서 난장판으로 흩어졌을 게 분명한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수습하려고 뒤를 돌았다.
"…야, 뭐해."
"응?"
보면 모르겠냐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즈쿠에 카츠키는 더 말을 하진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 흩어진 음식물을 사이에 두고 이즈쿠의 앞에 선 카츠키는 그를 따라 쭈그려 앉았다. 그 역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던 건지 멀쩡한 제 봉투는 복도 벽에 기대게 해 세워 두고서는, 그냥 터진 게 아니라 아랫부분이 죄 뜯어져 거의 반토막이 난 쓰레기 봉투를 쥐고 제 것도 아닌 음식물 쓰레기를 그 안에 꾸역꾸역 밀어넣는 손을 카츠키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다, 멍청하게 착한 거. 저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한 녀석의 쓰레기나 주워주고 있는 꼴이란. 카츠키는 괜히 눈이 따끔거려 꽉 감았다 뜨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제 마음을 자각한 이후 왜인지 지나치게 다정한 이즈쿠를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또 갑자기 들이닥친 제 감정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이즈쿠가 주워담고 있는 것이 제가 떨어뜨린 쓰레기임을 자각하고서 번뜩 정신을 차린 카츠키가 놀란 얼굴로 엉거주춤 반 걸음 더 다가가 그를 도우려 손을 뻗었다. 이즈쿠가 다가오는 손을 보고 손사래쳤다.
"내가 할게."
"내 거잖아."
"손 더러워져."
니 손이나 보고서 말하지 그래. 속으로 투덜거린 카츠키는 허공에서 어떡해야 할지 몰라 손을 움찔거리다 손 도로 가져가, 하는 나름 단호한 음성에 그것을 무릎 위에 얹었다.
말없이 사방에 흩어진 음식물을 분주히 쓸어담던 이즈쿠가 입을 조금 열었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고 말을 꺼냈다.
"오늘은 일 없나봐."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카츠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버렸다. 몸이 흠칫 떠는 걸 똑바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어 이즈쿠는 슬쩍 웃었다. 그 미소가 울 것 같은 얼굴과 다르지 않은 것에 미안해져서 카츠키는 억지로 몸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응."
목이 잠겨있어 카츠키는 바로 입을 다물고 큼큼, 헛기침했다. 이즈쿠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번 얼굴은 조금 덜 슬퍼보여서 카츠키는 안심했다. 그렇지만 다시 정적.
잠깐의 침묵 동안 쓰레기는 어느정도 수습이 되었는데, 주워담는 손이 느려진걸 보아 이즈쿠는 계속 그와 대화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여기, 냄새나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너와 대화를 나눈다면 좋다. 카츠키는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이즈쿠가 알게 된다면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해져 무릎에 코를 박았다. 흘끗흘끗 그를 곁눈질하며 무어라 말을 해볼까 고민하던 카츠키에게, 이번에도 이즈쿠가 말을 걸었다.
"덴키 유치원은 잘 보냈고?"
"어? 아, 응."
"아아."
…너는, 월차?"
고개를 끄덕이는 이즈쿠의 머리카락을, '응' 말고 다른 말을 한 게 새삼 부끄러워 괜히 눈으로 세어보던 카츠키가 한 마디 더 건네볼까 싶어 턱을 무릎에 대고 입을 열었다. 그럼, 하고 시작된 카츠키의 말을 이즈쿠가 끊었다.
"저."
"…어?"
"말 끊어서 미안. 하지만 하고싶은 말이 있어. 지금, 꼭."
"뭔데."
"너, 있잖아. 음, 그러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돼."
왜?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말을 쉬이 꺼낼 수가 없었다. 이 말을 꺼내느라 이즈쿠가 무지 고민하던 거 느꼈기도 하고, 딱히 좋지 못한 이유일까봐. 그래서 가만히, 봉투 끝을 묶으려 애쓰는 이즈쿠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이즈쿠가 혼잣말하듯 중얼중얼, 그렇지만 확실히 카츠키에게는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냥, 자연스럽게 있어.
"……."
"네 일이나, 덴키나 신경 쓰기 이미 바쁘잖아."
"…그닥."
피식 웃은 이즈쿠가 금방이라도 풀릴 듯 이상하게 지어진 매듭을 쭉쭉 당겼다. 나 이제 익숙해져서 일도 별로 안 힘들고, 어른 아들이라던가 그런 것도 없어. 물론 덴키가 아들… 같지만. 아니, 네 아들이긴 한데. 그러다 매듭이 툭 끊어지자 이즈쿠가 아씨, 하고 작게 성질을 냈다. 가끔 보여주는 저런 애 같은 면들을 좋아해 카츠키는 웃었다. 꽤 상냥한 웃음이었다. 시선을 쓰레기 봉투에 처박은 이즈쿠는 볼 수 없었지만.
다시 매듭을 지으려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이즈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대로 있어."
"……."
"내가 다 할게."
지켜보는 거, 다가가는 거, 그리고… 사랑하는 거.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창피했는지 입술을 잘근 씹는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이즈쿠가 이번에는 조금 그럴듯한 매듭을 완성시켰다. 카츠키는 대체 이 사랑스럽고, 바보 같고, 친절한 남자에게 무어라 대답해줘야 좋을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아버렸다. 어렵다. 그가 건넨 따뜻함 만큼 건네주고 싶은데 그게 너무 커서 카츠키는 할 수가 없었다. 난 왜 아무것도 못하지, 자책하며 입 안 여린 살을 이로 아프게 괴롭혔다.
푸, 하고 숨을 크게 뱉은 이즈쿠가 고개를 들었다. 피할 새 없이 마주하게 된 두 눈이 제법 진지한 빛을 띠고 있어, 그의 말이 전부 진심이라고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어 카츠키는 또다시 꼴사납게 울어버릴까봐 입 안을 더 세게 씹어댔다.
울망울망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서 이즈쿠는 웃었다. 어딘가 어설프고 울 것 같지만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 파트너 같은 거 말고."
"…응."
"제대로 된 친구부터 시작하자."
"……."
"싫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카츠키에 이즈쿠는 정말로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 다시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 벅찬 얼굴을 벅찬 마음을 온전히 받아버려 카츠키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려진 시야에 이즈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이 보였다. 어른인 척 그래서 다 괜찮은 척 버티고 서 있던 마음까지 무너져 버렸다.
냄새나는 빌라 복도에 쭈그려 앉아,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게 울음소리를 꾹꾹 삼키며 흐느껴 우는 두 어린 어른의 나름 괜찮은 아침이었다.